[영웅 소개] - [대지] 브란두흐
정해진 파멸의 순간이 존재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움직이겠습니까? 두려움에 떨다 무너진 잔재 속에 파묻히게 될까요, 기댈 것이라고는 자신의 두 다리뿐인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일어나 맞서 싸우게 될까요? 별의 개수만큼 거대한 우주에는 수천만의 답이 존재하겠으나, 이곳에서는 좀 다릅니다. 책임을 아는 자, 어깨 위에 짊어진 백성들의 목숨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에게는요.
태어난 순간부터 왕국의 계승자였던 브란두흐는 쉴 틈 없이 움직여야만 했습니다. 올바른 길을 찾고 이끄는 것. 군주로서의 사명. 각 분야에 통달하기 위해 이론 공부도 게을리할 수 없었고, 그의 양어머니이자 스승인 대마도사 릴리안의 영향으로 경지를 넘어선 마법을 깨우치기도 했죠. 가장 놀라운 건 이 모든 걸 빈틈없이 해내는 동안에도 불평 한번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타고난 그릇의 크기와 온화한 성품은 브란두흐를 완벽한 왕의 재목으로 만들었지요. 그뿐일까요? 브란두흐는 매일 세상에, 그보다는 이 우주의 섭리에 감사했습니다. 지켜 마땅한 이들을 지탱하게 되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까요?
그러나 파멸은 반드시 찾아옵니다. 그가 기리던 우주의 섭리라는 건 별반 위대한 게 아니었거든요. 브란두흐의 삶은 어떤 의도에 의해 직조된 것도 아니거니와, 겹친 행운의 끝에는 비로소 균형을 위한 불행의 추가 드리워지기 마련이죠.
대재앙의 날, 브란두흐는 직감적으로 깨닫습니다. 타고난 재능과 축복으로 둘러싸인 환경은 곧 이 순간을 위함이었다고요. 그는 생애 갈고 닦은 모든 기술과 생명을 쏟아부어 단 하나의 방벽을 세웠죠. 자랑하던 왕국의 성채는 그 자체로 재앙의 침입을 막아내는 요새로 변했고, 백성들은 도망칠 시간을 얻게 됩니다.
그의 계산으로는 그게 마지막이었습니다. 백성들을 위한 토대이자 방벽으로서 그 순간에 스러져 영영 역사의 뒷길로 사라져야만 했지요. 그랬던 브란두흐가 어떻게 생을 부지한 채 기나긴 잠에 빠져들었는지, 방벽을 세우기 직전 희미하게 느껴졌던 백합 향은 무엇인지 알 방법이 있었을까요? 해답을 찾을 길은 요원해 보이나, 어쨌든 이 다정한 희생자가 다시금 세상을 구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만은 자명합니다. 이전보다는 외롭지 않을 테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