챤물

긴 역사를 가진 대륙 서부의 강대국 플로렌스.
본디 문화와 예술의 성지였던 그곳은 현재 아발론의 침략에 의해 전쟁터가 되었다. 변방의 소국이 대륙을 강대국을 침략하는 황당한 광경이었다. 플로렌스의 국왕 카를로스 3세는 조국이 승리하리라 믿었다. 그러나 뜻밖의 문제가 생겼다.

카를 3세의 예상과 달리 아발론의 힘은 강했다. 플로렌스의 최고의 기사들만 모인 쏜즈 오더 기사단이 아발론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기 때문이다. 카를 3세는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대책을 강구했다. 그는 자신의 과오로 만들어낸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서든 수습하려고 했다.

수습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백성들이 나라를 배신하고 아발론을 추앙하기 시작했다. 최악의 상황 속에서 플로렌스는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카를 3세는 멸해가는 나라를 보면서도 자리를 지켰다. 도망이라는 선택지 대신조국과 함께 명예롭게 죽고자 했다. 선조들이 일군 나라는 망친 죄를 책임지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세상 일이 늘 그렇듯 누군가의 뜻대로 굴러가지 않기 마련이다.

**

그대가 스스로 과오를 깨닫게 될 때까지
스스로 책임을 다할 수 있을 때까지
그대를 아발론에 구금한다.

아발론의 군주라는 자가 내게 그렇게 말했다. 차라리 죽음을 맞이했다면 더 좋았을 것을. 왕으로써 죽지 못한 나는 결국 아발론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대삼림을 지나 도착한 아발론은 변방의 소국답게 작았다.

까드득-
나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아발론의 성을 보자마자 정말 저게 성이 맞는 건지 의심했다. 돌로 된 성벽에 전체적으로 칙칙한 분위기는 왕성보다 요새에 가까웠다.

“하!”
기가 차서 웃음이 나왔다. 나의 조국을 무너트린 자들이 이딴 성에 살고 있었단 말인가?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병사가 내 팔을 붙잡았다.

“가시죠.”
한 마디의 말을 툭 내뱉은 병사는 나를 끌고 가려 했다. 나는 그 병사의 팔을 쳐내고 스스로 가겠다고 말했다. 쓸데없이 힘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소란을 피운다고 해서 플로렌스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발론에 온 이상 내가 가게 될 곳은 뻔했다.
‘어차피 감옥이겠지.’
씁쓸하지만 인정해야 했다. 아발론에서 나는 포로일 뿐 군주가 아니었다. 나는 병사들을 따라 망할 성 안으로 들어갔다.

나의 성보다 촌스럽고 우중충한 이 성은 내부도 칙칙했다. 금으로 된 장식만 조금 있을 뿐, 보석은커녕 조각상이나 예술작품도 거의 없었다. 플로렌스에 비하면 굉장히 허전했다. 꽃으로 치장되어 있지도 않았고 곡선이 적었다. 여기가 나라의 중심이라니 정말 최악이었다. 햇살에 비친 먼지까지 다 별로였다.

위층으로 올라가던 중, 저 멀리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알현실로 향하는 복도로 추정되는 곳이었다. 비록 병사들의 통제에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지만, 높은 층에 있었기에 소리의 근원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아발론 소속의 기사들과 쏜즈 오더의 전 부단장. 멀리서도 한 눈에 구별되는 강한 개성 때문에 못 알아보기도 어려웠다. 검은 생머리의 기사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이제 동료가 됐네! 잘 부탁해!”
힘이 넘치는 여성의 목소리가 계단까지 울렸다. 새로운 동료에게 곧바로 반말을 하다니 정말 예의 없는 기사였다. 하긴 군주 앞에서도 버릇없이 굴었으니 이상할 것도 없었다. 옆에 있던 노란 머리 녀석이 턱을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이제 자이라 경이라 불러야겠군요.”
버르장머리 없는 푸른 기사와 달리 차분한 말투였다. 성기사라서 그런지, 예의바르고 단정한 그는 나를 포로로 대하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와! 새로운 동료가 생기다니 너~무 기뻐요!”
두 기사와 함께 있던 빨간 모자를 쓴 소녀가 말했다. 온몸으로 기쁨을 표현하는 것이 과연 어린 나이라 할 수 있을 법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미천한 출신인 그와 동료가 된다는 게, 왜 기쁜 일인 걸까. 이해가 안됐다. 그나저나 전 부단장이 이런 곳에 있을 줄은 몰랐는데.
“...감사합니다.”
전 부단장이 쑥스러워하며 말했다.

늘 무표정을 짓기에 감정이 결여된 인간인줄 알았건만. 내 착각이었나 보다. 플로렌스를 완전히 잊은 듯한, 전 부단장의 모습에 속이 울렁거렸다. 나는 그가 전투에서 패배했을 때 죽은 줄 알았다. 그런데 멀쩡히 살아서 아발론에 있다니.

“...배신자.”
저런 자를 부단장으로 내세우지 말았어야 했다. 크롬은, 아발론의 기사들은 왜저 자를 아끼는 걸까. 도무지 알 수가 없다.

**

병사를 따라 오게 된 감옥은 플로렌스의 감옥과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주기적으로 청소를 했으며 밥도 제때 넣어주었다. 세심한 부분까지 챙기지 않는 나에겐 생소한 풍경이었다. 왕성에 고용된 자들 중 나에게 폭력을 행사한 자는 한 명도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정치 신념이 정말로 실천되고 있기라도 한 듯, 모두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했다. 내가 죄수가 아닌 포로이기 때문일까. 지나치게 잘해줘서 부담스러웠다.

“이곳에 좀 지내보니 어때?”
감옥을 찾아온 아발론의 군주가 창살을 사이에 두고 내게 물었다.

“자기 손으로 가둬놓고 안부를 묻다니, 날 조롱하는 가?”
내가 비웃으며 되물었다. 물빛 보석처럼 아름다웠던 내 머릿결이 이렇게나 푸석 푸석해졌음에도 알아보지 못한단 말인가. 눈썰미가 어떻게 된 것이 분명했다.

솔직히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한 나라의 군주였던 내가 감옥 생활을 편하게 느낄 수 있겠느냔 말이다. 그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다. 그들에게 나는 그저 속국이 된 플로렌스를 완벽하게 통치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살려두기만 해도 될 텐데, 잘해주기까지 앞 날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조롱으로 느껴졌다면 사과하지. 그전에 부탁이 있어.”
속을 알 수 없는 그자가 의연하게 말했다. 그나저나 웃기는 말을 하는군.
“부탁?”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나 같은 포로에게 부탁이라니 말 자체가 가소로웠다. 자신이 군주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예의를 갖추시죠.”
빈정거리는 나의 태도에 그자의 옆에 있던 노란 머리의 성기사가 말했다. 충성심이 깊은 모양인지 불쾌감을 적나라하게 내보였다. 우스웠다. 겁 없는 군주를 모
시느라 기사들이 고생이었다.

“요한, 나는 괜찮아.”
그자가 기사를 막았다. 그리고 내게 진지하게 물었다.
“들어줄 텐가?”

“굳이 부탁을 하는 이유가 뭐지?”
불쾌감이 여지없이 들어났다. 명령하면 그만인데 이렇게 직접 찾아와서 ‘부탁’까지 하다니 어이가 없었다. 그동안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 두려움에 떨던 나는 뭐가 된단 말이냐. 나에게는 없는 굳세고 당당한 태도가 여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자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플로렌스에 관한 일이야.”

**

(*하드 엘펜하임 3-3 대화 스크립트有)

플로렌스라는 말에 흔들리지 말았어야 했다. 감옥에서 나온 것까지는 좋았으나 이건 좀 너무 하지 않는가. 서류더미에 깔려 죽느니 차라리 도망쳤어야 했다.

“툴루즈 영지의 세수 보고서입니다.”
“...”
내가 온 후로 얼굴에 생기가 돌고 있는 아발론의 책사가 내 책상에 새로운 서류들을 올려 놨다.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에 표기해 두었으니 검토를.”
당연한 일처럼 나에게 일을 시키는 그를 보니 속마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너희들... 제정신이냐..?”
보고 내용은 잘 모르겠고 이 상황 자체가 납득 가지 않았다. 돌아오는 대답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에스프레소를 3 잔 째 마시긴 했지만 아직은 괜찮군요.”
내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면서도 엉뚱한 대답을 하다니 짜증이 일었다.

“플로렌스의 전후 행정 처리를 내게 맡기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내가 직설적으로 물었다.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잘 갖춰진 이 업무실에는 책상이 하나 밖에 없다. 내가 쓰고 있는 이 자리 말이다. 이렇게 작정하고 준비해 놓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하여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행정관들은 새로운 제도를 가다듬느라 바쁩니다. 그리고 귀하만큼 플로렌스 전역의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효율적이지 않습니까?”
책사가 담담하게 말했다. 뻔뻔한 그 얼굴을 보니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단체로 나를 놀리는 게 분명했다.

“대체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내가 어째서 내 나라를 멸망시킨 너희를 도와야 하는 거냔 말이다!”
내가 책상을 치자 옆에 있던 찻잔이 흔들렸다. 차가 쏟아지든 말든 나는 아랑곳 하지 않고 그에게 성을 냈다.
“나를 효율적인 도구로 취급하지 마라!”
패전국의 군주로써 죽지 못하고 이렇게 도구로 사용되다니 원통했다. 나는 전장에서 죽음을 각오했었다. 사랑하는 나의 조국과 함께 마지막을 준비했었다. 그때의 나는 도망가지 않았다. 군주로써 책임을 다하고자 했을 뿐이다. 이런 결말을 원했던 게 아니란 말이다.

“플로렌스는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지도자가 바뀌었을 뿐이지요.”
책사가 냉정하게 말했다.
“...그것이 바로 내 나라의 멸망이다...! 나는 플로렌스의 정당한 통치자이며, 군주였다!”

그의 말에 화가 났다. 네 놈이 플로렌스에 대해 뭘 안단 말이냐.
“세습된 왕위야 그렇다 치더라도, 모두에게 정당한 통치 방식은 아니었다고 생각되는 군요.”
책사가 말했다. 마치 그 자신은 정의롭고 올바른 판단만 내리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는 듯이 말이다. 듣는 입장에서 굉장히 불쾌했다.

조국의 악습과 폐단을 내가 모른다고 하면 그게 더 우습지 않은가. 나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서 함부로 대하는 아발론의 태도는 무례함을 넘어서 도가 지나쳤다. 그대들이 뭘 안다고 나에게 그런 말을 한단 말인가.
“...나를 납득시키려 하지 마라. 어린 아이 가르치듯 말하지 말라...!”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에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책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잘못은 반성하고 고쳐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사람이 어떤 인생을 가지고 있던, 어떤 꿈을 꾸건 상관없이, 계급에 의한 비합리적 착취를 당하는 것이 바로
그대들이 품고 있던 악습입니다.”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내가 생각을 바꾼다고 한들 이제 와서 뭐가 바뀌지?

“이렇게 삶을 연장하고픈 마음은 전혀 없다.”
그의 말처럼 나도, 플로렌스도 아직 죽지 않았다. 승전국의 힘에 의해 명을 이어 나가고 있다. 마지막까지 지키고자 했던 나의 명예는 이제 물거품이 되었다.

“적어도 왕위에 있던 자로서 고결한 최후를 맞이할 수 있도록 해다오.”
태연한 척했지만 실로 비굴한 부탁이었다. 역사에 남을 가문의 말로는 나에게 달렸다. 타인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는 한, 나는 강제적으로 삶을 이어가야만 했다. 나를 보는 책사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플로렌스의 노예는 자신에 대한 생사결정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귀하는 현재 노예...까지는 아니지만, 포로라는 계급에 위치해 있지요. 자신의 처지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애초에 그가 들어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만 저렇게까지 흔들림 없는 굳건한 자세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말 건방진자로군... 너 같은 자가 플로렌스에 있었다면, 그 말로는 실로 처참했을 것이다...!”
내말에 책사는 그런 자가 없으니 나라가 망했다고 이야기했다. 흘려듣고 있던 중, 그의 입에서 크롬의 이름이 언급됐다.

“크롬...”
출정한적 없는 책사가 크롬을 알고 있다면 크롬이 현재 아발론에 있다는 말이 된다.
“크롬은 어디에 있나?”
나의 물음에 책사가 날 똑바로 바라봤다.
“그 또한 구금되어 있지만, 그보다는 귀하의 입장을 생각하셔야 할 겁니다. 귀하의 프라이드와 왕족으로서 살아오면서 체득한 권위의식, 특권의식... 앞으로는 그 모든 것을 내려놓는 과정이 필요할 겁니다.”
내가 살아오면서 누린 모든 것을 내려놔야 한다고?

“제길... 내가 ... 내가 왜... 내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놓고...”
대체 얼마만큼의 치욕을 주려는 속셈이냐.

“잡담이 너무 길었습니다. 업무를 다시 진행하도록 하죠.”
책사가 아까보다 더 많은 서류들을 내 책상에 올려뒀다.
“ ..이..이익...”
엄청난 양이었다. 이걸 혼자 다 하라니. 극악무도한 것들!

**

행정 일을 맡게 되면서 나의 거처가 감옥에서 작은 방으로 바뀌었다. 감시는 여전해지만 크게 신경 쓰이진 않았다. 서류에 파묻혀서 고생을 했기 때문인지 피로가 몰려왔다. 방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감옥보다 푹신한 침대는 편안했고 춥지도 않았다. 일을 더 잘하라는 무언의 압박인 걸까. 전혀 기쁘지 않았다.

‘크롬은 어디 있는 걸까.’
사실 아발론에 온 뒤에도 크롬을 잊은 적이 없다. 버릇없는 푸른 기사만 보면 그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푸른 기사는 아발론의 군주를 벽 없는 친구처럼 대했다. 그들도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듯 했다. 나와 크롬처럼 말이다.

크롬은 충성스러운 신하이자 나의 친우이기도 했다. 그는 플로렌스가 패배하기 직전까지 날 지켜준 든든한 대장군이었다. 그는 푸른 기사와 달리 성격도 차분했고 예의 바른 귀족 자제였다. 금빛 갑옷을 입고 전장에서 싸우던 크롬은 왕실의 수호자로써 나를 보호해주는 가시와 같았다.

웃음이 나왔다. 아발론을 탈출하는 건 꿈도 꾸지 못했 었는데 약간의 희망이 보였다. 어쩌면 이 망할 요새같은 성에서 벗어나 플로렌스로 돌아갈 수 있을 지도 몰랐다. 책사는 크롬을 아발론으로 영입할 생각인 것 같지만, 그가 날 배신할 리 없었다. 게다가 크롬이라면 나의 부탁을 들어줄 것이다.

‘만나면 일단 탈출 계획부터 세워야겠군.’
플로렌스로 돌아간다면 귀족들의 도움을 받아 다시 나라를 되찾을 수 있을 지도 몰랐다. 보고 내용을 보아 상당한 압박을 받고 있는 듯했으니 잘 따라와 주겠지. 나를 믿어주는 자들이 남아 있다면 못할 것도 없었다.

**

아발론에서 플로렌스의 행정을 맡게 된 후 며칠이 지났다. 현재 아발론의 군주와 기사들은 출정으로 인해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그들이 없으니 크롬과 더 쉽게 만났을 수 있을 터. 그럼에도 내가 아직까지 크롬과 만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하...”

책상 위에 있는 종이, 종이, 종이... 일이 너무 많았다. 그동안 책사인 루인이 혼자 일했다는 게 믿겨지지 않았다. 홀로 소화하기에는 너무 방대한 양이었다. 괜히 업무 지옥이라 부르는 것이 아니었다. 얼마나 많은 지 일이 반 정도 줄어들면 새로운 일감이 생겼다. 그렇게 늘어난 일은 대체로 밤까지 해야 했으며 자칫 새벽까지 업무가 이어지기도 했다.

누군가는 일하다 죽는 거 아니냐며 걱정을 할 수도 있다. 만약 그런 걱정을 해준다면 내 입장에서는 고마울 따름이지만, 책사인 루인은 똑똑한 자였다. 그가 날 죽게 놔둘 리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내사 과로사로 죽지 않도록 충분한 수면과 적당한 식사를 주었으며, 스트레스 감소를 위해 다과도 주었다. 말만 들으면 금상천화다. 매일 밤까지 야근을 하며 휴일이 적다는 점만 빼면 말이다. 업무는 계속 쌓이고 밀리면 끝도 없었다. 쉬기 위해서는 받은 일을 빠르게 처리하는 방법 밖에는 없었다.

그나마도 방해받지 않는다면 참 다행이었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했던가. 발랄한 고음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뭐해? 쉬어? 일 다 했어?”
젠장. 목소리만 들어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풀빛으로 무장한 이 작은 비행 생물, 아발론에 사는 요정 ‘칸나’다.

“ 네 녀석이랑 놀 시간 없다.”
내가 시선도 주지 않고 단호하게 말하자 악마 같은 요정이 혀를 놀렸다.
“아잇, 참. 그러지 말고 이 칸나님을 즐겁게 해 보란 말이야!”
“싫다.”
귀찮기 이를 데 없었다. 나는 요정을 밀어내고 다시 보고서를 읽었다. 귀족 가문이 키우던 사병들을 처리하는 과정이 까다로웠기에 꼼꼼하게 봐야했다. 이런 내상황을 모르는 저 작은 악마는 반짝이를 뿌려 대며 내 앞에서 알짱댔다.

“정말 나 안 놀아 줄 거야?”
“그렇다.”
성의 없는 대답이었지만 저 요정에게 한두 번 당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저 망할 요정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도록 서류만 뚫어져라 봤다. 그런데 이 요망한 것은 포기할 줄 몰랐다.
“그럼 크롬이랑도 안 놀아 줄 거야?”
말도 안되는 물음이었다. 여기서 크롬이 왜 나온 단 말이냐.
“지금은 바쁘다.”
내가 대강 말하자 칸나가 꺄르륵 웃었다. 마치 내가 그 말을 하기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다.
“역시 바쁘시군요... 그럼 다음에 오겠습니다.”
잠깐, 이 목소리는 칸나가 아니다.
“기다려라...!”
고개를 든 나는 뒤늦게 상황파악을 할 수 있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크롬이 들어온 것이다. 요정과 같이 들어온 건가? 하마터면 만나고자 했던 인물을 내 손으로 내보낼 뻔했다.

“하지만 바쁘시다고...”
크롬이 난색을 보이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망할 요정에게 거짓말했을 뿐 진짜로 바쁜 건 아니었다.
“지금은 괜찮다.”
내 말에 요정이 노발대발 성을 냈다.
“나한테는 바쁘다며!”
“네 녀석은 방해만 될 뿐이다!”
“뭐라고?! 흥, 앞으로 너 랑 안 놀 거야!”
내 말에 삐진 칸나가 업무실을 나갔다. 크롬이 곤란한 얼굴로 칸나가 나간 문을 쳐다봤다.
“저래도...괜찮습니까? 기분이 많이 상하신 것 같은데.”
“저런 말을 해도 또 오는 녀석이다.”
눈치 없기로 유명한 크롬이 신경 쓸 정도라니. 나중에 간식이라도 줘야겠군. 지금 나에게 중요한 것은 따로 있으니 말이다.

“경, 아니 이제는 크롬이라고 불러야겠군.”
차분하게 말했지만 반가움을 감추기가 힘들었다. 아발론에 온 후 계속 혼자였기에, 나도 모르는 사이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나 보다.
“...폐하. ”
폐하라... 실로 오랜만에 듣는 말이었다. 그러나 아발론에서 불릴 만한 호칭은 아니었다.
“내가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더냐. 너도 나를 이름으로 부르거라.”
내가 따끔하게 말하자 자신의 실수를 알아챈 크롬이 호칭을 바꾸었다.
“카를로스.”
그의 부름에 나는 들고 있던 펜을 내려 두고 그를 바라봤다. 초록으로 빛나는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래, 여기는 무슨 일로 왔는가?”
내가 그를 만나고 싶었던 것과는 별개로 나를 찾아온 그에게도 이유가 있을 터. 나를 찾아온 그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 둘 필요가 있었다.
“묻고 싶은 말이 있어왔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나는 습관적으로 의자에 몸을 기대고 팔짱을 꼈다.

“당신에게 저는 어떤 사람입니까?”
의외의 질문이었다. 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답을 했다.
“충실한 신하이자, 실력 좋은 대장군이다. 아, 이제는 신하라고 할 수 없겠군.”

“...더 이상 친우가 아니라는 말입니까?”
크롬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 쓸데없는 고민을 하고 있었다니. 상상도 못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게냐. 다른 것은 몰라도 네가 나의 친우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정말입니까?”
“내 말을 못 믿느냐?”
내가 날카롭게 묻자 크롬이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다만...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저희가 군신관계를 벗어나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 않습니까.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를 대하는 일이 불편하게 느껴 지실 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괜찮으신 겁니까? ”
걱정이 묻어나오는 담담한 말에는 뼈가 있었지만, 나 또한 비슷한 생각을 했기에 안심이 됐다.

“크롬. 네 이마에 상처가 났을 때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느냐?”
크롬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멍청하다고 하셨습니다.”
설마 그 말 때문에 물었겠는가. 정말 눈치 없는 녀석이었다.
“뒷말이 더 있지 않느냐.”
크롬이‘아’하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상대가 제 1왕자라고 해서 가만히 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다행이 제대로 기억하고 있군.
“내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잘 생각해 보아라. 이게 나의 답이다. 그나저나 내가 더 묻고 싶군. 너는 괜찮은 것이냐?”
관계라 함은 서로의 합의가 있어야 했다. 나만 좋다고 해서 성립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동등한 관계가 된다고 해서 제가 잃은 것은 없으니까요.”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살짝 거슬렸다. 하지만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크롬이 말을 끝났을 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기 때문이다.

“시간 되셨습니다.”
루인의 목소리였다. 갑작스런 그의 등장에 조금 놀랐지만 이상할 것도 없었다. 크롬이 누군가의 허락 없이 이곳에 왔을 리 없으니까. 마시던 차가 식을 정도니,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난 모양이다. 결국 나는 크롬에게 탈출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다음날도 그 다음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

업무를 반복하다 보니 시간 감각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만큼 반복되는 일상의 연속되었다. 물론 그 안에서도 변화는 있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업무 처리하는 노하우가 생겼다. 그만큼 내가 일을 끝내는 속도가 빨라졌다. 일에 대한 통제가 가능해지자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루인이 추가로 가져오는 일이나 칸나라는 변수만 없다면 말이다.

“하...”
내가 한숨을 쉬자 루인이 말을 걸었다.
“요새 부쩍 한숨을 자주 쉬는 군요. 무슨 일 있습니까?”
같이 일을 하다 보니 신경 쓰이는 듯했다. 내가 없어지면 그에게 큰 손실이 생기니 그럴 만도 했다.
“...”
나는 침묵했다. 그에게 나의 고민거리를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내가 미쳤으면 몰라도 그에게 아발론에서 나가고 싶다고 말할 수 없지 않은가. 안 그래도 플로렌스 군주가 아니니 처신을 잘하라는 둥, 상대가 하인 이어도 말은 예쁘게 해야 한다는 둥 잔소리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내가 서류만 보고 있자. 루인이 무언가를 결심한 듯 말했다.

“혹시 휴가가 필요합니까?”

휴가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루인을 쳐다봤다. 휴가라는 말이 그의 입에서 나올 줄은 몰랐다. 늘 일에 파묻혀서 살다 보니 내가 정말 제정신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었다. 내가 말없이 동요하고 있자, 루인의 표정이 심각 해졌다.

“그러고 보니 휴가를 드린 적이 한 번도 없군요.”
애초에 이곳에서 ‘휴가’라는 말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쏟아지는 업무량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인력 때문에, 누구 한 명이라도 쉬게 된다면 그 손실은 어마어마했다.
“줄 생각도 없었던 거겠지.”
내가 비꼬며 말했다. 내가 이곳에 배정된 이유도 그 손실을 막기 위함이지 않은가.
“그렇지 않습니다.”
루인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한쪽 눈썹을 치켜들자 그가 작게 웃더니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제 말을 믿지 않으실 지도 모르겠지만 정말입니다. 주어진 일을 잘 해냈다면 그에 따른 보상을 주어야합니다. 확실히 이정도면 피로가 쌓일 만도 하니, 내일 하루만 휴가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뜻밖의 횡재였다. 휴가를 주는 대신 까다로운 조건을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왜지...?’
조금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창문을 본 나는 루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유리에 비친 내 얼굴은 가관이었다. 눈 밑이 거뭇했고 안색이 나빴다.
‘하긴 제대로 쉬질 못했으니.’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입 안이 썼다. 시간이 지날수록 몸도 마음도 지쳐갔다. 마침 휴가를 받았으니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어서 빨리 크롬과 이야기를 나눠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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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습관 때문에 일찍 일어난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업무실로 갈 뻔했다. 문을 열기 전에 생각이 나서 다행이었다.

나는 오전동안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휴식을 만끽하기로 했다. 느긋하게 지내본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플로렌스에 있었을 때도 나는 늘 바빴다. 아발론 같은 소국은 몰라도 대국을 다스리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아발론의 행정일이 많아진 것도 대국인 플로렌스를 점령했기 때문이지, 원래라면 루인 혼자서도 행정을 처리해도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니 문제였다.

‘됐다. 이런 소국에서 무엇을 바라리.’
나는 잡념을 떨치고 여유롭게 차를 마셨다. 이 방을 낮에 사용해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니, 명확하게 말하자면 나는 왕성에서 감옥과 업무실, 이 방, 그리고 식사자리 이외에 가본 곳이 없었다. 교류도 거의 없어서 왕이었을 때 직접 올 일도 없었다.

눈치 빠른 이들은 벌써 예상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 크롬을 만나고자 했던 나는 결국 길을 잃어버렸다.
“웃지 마라!”
내가 버럭 화를 내자 칸나가 까르륵 웃었다. 하필 칸나에게 걸리다니 재수가 없었다.
“크흠! 알겠어, 알겠어. 이 칸나님께서 친히 방에 데려다 줄께!”
풀빛 요정이 고개를 빳빳이 들고 말했다. 하여간 저 망할 요정은 좋아하고 싶어도 좋아할 수가 없었다.

캉-
앞장서는 칸나를 따라 복도를 걷고 있는 데, 어디선가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봐.”
내가 요정을 부르자 칸나가 투덜거렸다.
“난 ‘이봐’가 아니고 ‘칸나 님’이-”
“가까이에 훈련장이 있느냐?”
내가 말을 끊어서인지 칸나가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고선 ‘흥, 안 알려줄 꺼야!’ 라고 말하더니 가버렸다.
‘곤란하게 됐군.’
하필 이럴 때 마저 도움을 주지 않다니. 정말 제멋대로인 요정님이었다. 하는 수없이 나는 소리에 의지해 훈련장을 찾아갔다. 아발론의 기사들이 어떻게 훈련하는 지 궁금했다. 쏜즈 오더 기사들을 이길 만큼 강했던 힘의 출처가 무엇인지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카를?”
내가 훈련장에 들어왔을 때, 누군가가 놀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크롬?”
내 눈도 커졌다. 그를 여기서 만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내가 그를 떨떠름하게 보고 있자, 크롬이 먼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여기서 뵐 줄은 몰랐습니다.”
반가워하는 눈치였다. 나도 반가웠지만 그보다는 당황스러운 감정이 앞섰다. 이곳은 아발론의 기사들이 사용하는 훈련장이었다.
“훈련 중이었나?”
내가 묻자 크롬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인 경이 저와 병사들과 실력차이가 너무 많이 난다고 해서 이곳에서 훈련 중이었습니다.”
웃으며 말하는 그는 기분이 좋아보였다. 아발론에 와서부터 한 번도 기분이 좋았던 적이 없던 나와는 달랐다. 위화감이 느껴졌다. 나는 감정을 누르며 훈련장을 둘러봤다. 아발론의 훈련장과 플로렌스의 훈련장은 비슷하기도 하면서 조금 달랐다.
“대련을 하던 때가 생각나는군. ”
목검을 들고 있는 크롬을 보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하시겠습니까? 남은 목검이 몇 개 있습니다.”
뜬금없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싫지 않았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크롬이 내게 검을 가져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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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장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우리 둘은 어릴 때처럼 검을 휘둘렀다. 그때와 달리 크롬의 눈빛이 빛나고 있었다. 당시에는 나에게 상처 입히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했는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팍-
크롬과 나의 검이 부딪혔다. 스스로 몸을 보호하기 위해 배운 검술이 전장을 지휘하는 점술을 이길 수는 없었다. 크롬은 큰 체구에도 날쌔게 검을 휘둘렀다. 당연한 말이지만 어릴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성장한 그의 실력은 플로렌스에서 가장 뛰어났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겨누어 보니 그 차이가 확연하게 느껴졌다.

목검이 서로 탁탁, 부딪혔다. 나는 힘과 기세에 눌려서 점점 뒤로 밀려났다. 맹렬한 공격을 막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어서 공격을 하지도 못했다. 그의 패턴을 알고 있어도 몸이 따라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휙-
크롬의 검이 내 귀를 스쳐 지나갔다. 내가 피했으니 다행이었지 방심했다가 상처를 입을 뻔했다.
“헉, 헉...”
무의식적으로 참고 있던 숨을 토해내 듯 뱉었다. 이런 식으로 내가 지다니. 그 때와는 다른 결말은 새로우면서 생소했고 낯설었다.

내 얼굴에 검을 들이댔던 크롬이, 이제는 나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나를 이런 식으로 쳐다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내가 알던 크롬이 아니어서 다른 사름을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십여 년 동안 본 그의 얼굴이 낯설게 느껴졌다.

크롬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잡고 일어섰다. 얼떨떨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대련에서 내가 이길 거란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단지 그의 행동이 내가 알던 것과 많이 달라서 당황스러웠다. 크롬은 원래 안면부 공격을 잘 하지 않았다. 내가 준 상처 때문이었다. 그런 그가 내 얼굴 쪽을 공격했다. 나는 말없이 그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돌아오는 답은 충격적이었다.

“카를로스, 저는 아발론의 기사가 되고 싶습니다.”
솔직하고 직설적인 말 한마디가 내 머리를 관통했다.
“뭐라고 하였느냐?”
내가 잘못 들은 거지?
“아발론의 기사가 되고 싶습니다.”
내 마음과 달리 크롬은 단호했다.
“거짓말하지 말거라.”
“아닙니다. 저는 정말로 아발론의-”
그의 말이 끝나기 전에 나는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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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으로 돌아온 나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사실 탈출이 불가능하다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다. 내가 맡은 일은 모두 플로렌스와 관련 있었다. 그러니 내부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머리 좋은 귀족들은 새로운 세력에 붙었고 전통성을 따지던 보수파 귀족들도 승전국 아래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내가 플로렌스에 돌아간다고 해서 다시 왕이 될 확률은 점점 낮아지고 있었다.머리로는 아는 사실이었고 믿고 싶지 않은 진실이기도 했다. 그런데 유일하게 믿고 있던 친우마저 나를 버리고 아발론을 택했다.

결국 살고자 발버둥 쳤던 나는 버려졌다.내가 일궈왔던 모든 것이 무너졌다.

‘얕보여서는 안 됩니다. 이제 그대는 국왕이 됩니다. 위엄을 잃지 마십시오. 품위 있게 행동하셔야 합니다.’
갑자기 이 말이 왜 떠오르는 건지 모르겠다. 씁쓸한 기분이었다. 선왕이셨던 아버지께서 급사하신 뒤 왕비였던 어머니가 나를 걱정해서 하신 말씀이었는데, 지금의 나는 국왕도 아니었고 위엄도 없었다.

플로렌스가 귀족들의 손에 놀아나지 않도록 나름의 최선을 다했다. 얕보이지 않기 위해 위엄 있게 행동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이곳에서 나는 한낱 외국인 포로에 불과하다.

아발론의 군주는 내게 과오를 깨달으라고 말했다. 주제도 모르는 것이 내게 그리 말했다. 아발론 같은 소국은 이해하지 못한다. 주변인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온 그라면 더더욱 모르겠지. 크롬은 대체 왜.

“그런 자가 뭐가 좋다고..”
솔직히 화가 났다. 아발론의 군주는 준수한 외모를 제외하고 그럴 듯한 장점이 없었다. 체구는 나보다 작았으며 싸움에는 소질이 없어 보였다. 물론 건방진 면을 보고 대담하다 칭찬할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었다. 그가 아발론의 기사들을 믿고 있듯이, 나도 쏜즈 오더 기사단을 믿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는 되고 나는 안 된단 말인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한 나라의 통치자로써, 나는 최선을 다했다. 지금까지 내가 한 일들이 전부 올바르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가장 이상적인 선택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모두가 나를 떠나간다. 믿었던 크롬마저 내게 등을 돌렸다. 심장이 답답하고 목이 메었다.

플로렌스가 패전했을 때, 죽지 못한 일이 후회가 되었다. 내손으로라도 숨을 끊었어야 했다. 스스로가 혐오스러웠다.

울음대신 웃음이 나왔다.
이제 보니 아발론의 군주는 이미 알고 있던 걸지도 모른다. 나는 내 잘못을 외면하며 살았다. 모르는 척하고 내 잘못이 아닌 척 회피했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사실이 이런 식으로 다가오니 막을 수도 없었다.

선왕께서는 ‘민의를 깨닫기 못한 자에게 왕의 자격은 없다’ 말하셨다. 딱 내 얘기였다. 무언가 에게 홀렸다 한들 나는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을 져야했다.

아발론의 군주가 말한 과오는 어쩌면 이것일지도 몰랐다. 그의 말에 따라. 나는 지금 뼈져리게 후회하고 있으니까.

그러나 내가 후회한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지?
군주가 아닌 나는 더 이상의 쓸모가 없었다. 군주로써 나라를 이끌어 가야 한다는 책임을 지고 살아온 나에게 삶에 더 이상의 의미가 있을까. 갑자기 허무 해졌다. 나는 미혼이었기에 사랑하는 반려자가 없었다. 거기에 가족도 없었다. 혈연은 있어도 사이가 소원했고 부모는 모두 돌아가셨다.

나에게 남은 사람은 크롬뿐이었다. 그는 아발론의 기사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다행히 크롬은 나에게 친우로 남고 싶다 말했다. 위한이 되는 말이었다. 처음에는 그가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알 것 같다. 그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걸까?
아마도 아발론의 기사가 되기로 결심하기까지 마음이 심란하고 무거웠을 것이다. 나에게 말할 이유도 없었을 텐데 굳이 알려준 이유는 나의 동의도 받고 싶었기 때문이겠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창밖이 어두워져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왔다. 복도를 걸으며 크롬이 아직 훈련장에 남아있기를 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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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한 훈련장에는 크롬이 혼자 남아 있었다. 크롬은 내가 다시 돌아오자 놀란 듯 했다.
“크롬, 너에게 난 어떤 사람이지?”
뜬금없는 물음이었다. 당황한 크롬이 입을 뻐끔거리더니 답을 했다.
“신경질적이고 소유욕이 강하지만 그만큼 가진 것에 대한 애착이 많고 아낄 줄 아는 책임감 있는 분이십니다.”
시작은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그는 나를 군주가 아닌 한 명의 사람으로 보고 있었다.
“고맙구나.”
진심이었다. 내 말에 크롬은 많이 당황했지만 이내 웃음을 보였다.

이후 우리는 조금 더 많은 대화를 나눴다. 아발론에서 각자 경험한 일이나 느낌에 대해 나누었다. 그리고 헤어질 때 나는 그에게 아발론의 기사가 되어도 좋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는 내 말에 기뻐하며 고마움을 표했다.

나는 방으로 돌아가면서 시원함을 느꼈다.

과거의 나는 나를 너무 몰아갔던 게 아닐까 싶다. 자존심이 강해진 것도 신경질적이고 예민해진 것도. 작은 일도 하나하나 멀리 내다보며 행동해야 했던 군주의자리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벅찼던 어린 시절. 그때부터 만들었던 나만의 규칙과 틀. 나는 이제 그 틀에서 나오려고 한다.

군주가 아닌 ‘나’라는 사람을 스스로 알아가기 위해서, 나는 알에서 나온 병아리처럼 땅에 발을 내딛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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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롬에게
페르사는 어떻 느냐? 그곳은 황야라서 덥다고 들었다. 열사병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는 게 좋겠구나. 다른 기사들과 어울려보니 어떻 더냐? 자이라는 잘 지내느냐? 나는 잘 지내고 있다. 비록 지금 칸나가 옆에서 내 머리를 잡아당기고 루인은 서류 더미를 안겨주었지만 늘 있는 일이니 괜찮다. 다치지 말고 무사히 돌아왔으면 좋겠구나.

ps 아발론의 군주에게 결제할 서류가 많으니 돌아올 때 각오하라 일러라.

카를로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