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무늬고양이

1

옛 지배자들의 어두운 암막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마냥 밝지만은 않았다. 그들의 지배하에 벗어난 것을 기뻐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이들이 죽어나갔다. 하지만 그렇기에 대륙은 억지로 축제 분위기를 형성했다. 최소한의 복구를 마치고 2차 마도대전에서 사망한 모든 이들을 기리고 미래를 축복하기 위한 축제를 열었다. 시끌벅적한 분위기에 감화된 사람들은 조금씩 기운을 되찾고 가족과 친구들을 잃은 슬픔을 이겨낼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과거를 딛고 일어설 수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세상을 구한 영웅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였다. 헬가 슈미트는 새벽을 등진 체 거대한 무덤 앞에 앉아 있었다.

며칠을 그렇게 앉아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시간을 헤아리는 것은 무의미했다. 남들에게 한 없이 긴 시간이라 할지라도 헬가에게는 찰나처럼 느껴졌다. 헬가는 말없이 자신과 함께 전장을 누볐던 친우가 잠든 곳을 바라보았다. 동굴 전체를 사용한 그 무덤은 헬가와 그녀가 처음 만난 곳이기도 했다.

오만했던 용과 치기어린 젊은 전사.

둘은 옛 이야기에서나 나올 법한 싸움을 통해 서로를 인정하고 영혼의 교감을 나누었다. 이윽고 서로를 향하던 두 이빨은 옛 지배자들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하지만 그 결과.

영원히 함께 할 줄 알았던 그녀의 파트너, 크메르사트는 결국 목숨을 잃고 말았다. 죽는 순간마저 헬가를 걱정한 그녀는 헬가를 지키기 위해 그녀의 창에 자신의 사념을 남기고 깨어나지 않는 잠에 빠졌다. 크메르사트를 잃고 난 직후에는 무력감을 느낄 틈도 없었다. 아직 그녀의 앞에는 옛 지배자들과 그들의 편에 선 용들이 남아있었다.

2차 마도대전이 끝나고 난 후에야 죄책감이나 자괴감, 슬픔과 분노, 외로움과 원망 같은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오랜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을 순수하게 기뻐할 수 없었다. 무덤 앞에 앉아 있던 헬가는 느릿하게 눈을 떴다. 조용한 결의가 번뜩였다.

몸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를 돌아보자 깊은 절벽과 태양빛을 나지막이 머금은 바다가 보였다. 복수를 다짐한 헬가의 앞에 어린 소녀가 나타났다. 성스러운 빛을 머금은 금실 같이 아름다운 금발과 하늘을 마주하는 듯한 투명한 푸른 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소녀였다.

“드디어 일어났네? 내가 온 것도 눈치 채지 못 하길래 난 또 무덤이랑 완전히 동화해 버린 줄 알았지 뭐야.”

“로잔나...”

로잔나 데 메디치.

사르디나의 통령이자 옛 지배자들로부터 함께 세계를 지켜낸 영웅이기도 했다. 어려보이는, 아니 어린애나 다름없는 외모와는 달리 그녀의 나이는 인간의 수명을 초월해 150살에 가까웠다.

“여긴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긴. 한창 축제가 진행되는 와중에 전쟁의 주역 중 한 명이 궁상맞게 혼자 있는 게 걱정돼서 와봤지.”

“주역은 무슨. 우리가 영웅이라 떠받쳐지고 있긴 하지만 그 승리는 전쟁에 참여한 모두가 있었기에 이뤄낼 수 있었던 거야.”

“그 말에 부정은 않겠지만 자신의 위업을 축소시키는 건 좋지 않은 버릇이야.”

로잔나는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어린아이의 외견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물건 두 개를 헬가에게 내밀었다.

“죽은 자를 기리기 위한 자리에 빈손으로 올 수는 없잖아?”

“...고마워.”

마개를 따자 은은한 포도 향이 산 중의 안개와 섞여 자욱하게 퍼져나갔다. 전쟁을 끝낸 영웅이 마시기에 부족함 없는 술이었다. 헬가는 술잔에 술을 따르고 남은 술은 크메르사트가 잠들어 있는 무덤 앞에 뿌리고 그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참을 그렇게 그녀와 술잔을 나눈 헬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르디나는 어때?”

“국고를 때려 박은 축제야. 즐거워하지 않을 리 없지. 다른 곳도 비슷한 분위기야.”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한 로잔나가 되물었다.

“넌 이제 어떻게 할래? 나로서는 발터처럼 나라의 중진이 되어줬으면 하는데.”

“난...”

헬가가 대답을 망설이자 로잔나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복수 할 생각이지?”

“...응.”

“우리가 도와주지 않아도 돼?”

“물론 너희가 도와준다면 든든 할거야. 하지만 그건 더 이상 복수라고 볼 수 없어. 인간과 용의 새로운 전쟁이 될 테니까.”

남은 술을 모조리 들이 킨 헬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건 나 혼자 해야 할 일이야.”

설령 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도 모르게 웅얼거린 헬가의 말에 로잔나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로잔나의 푸른 눈동자가 이글거리듯 타올랐다.

“용은 어떻게 찾을 생각이지?”

로잔나는 애써 분노를 가라앉히며 입을 열었다. 전쟁이 끝나고 황급히 자취를 감춘 그들을 찾기란 요원한 일이다.

“사냥한 용의 부산물을 넘기는 걸 대가로 미리안드가 도와주기로 했어.”

‘미리안드가 나사 빠진 놈이긴 했어도 친구의 복수를 돕는 것에 대가를 바랄만큼 박정한 녀석은 아니야.’

분명 헬가가 선을 그은 것이리라. 헬가는 이미 모든 것을 홀로 짊어지기로 결심한 상태였다. 여기서 자신이 뭐라고 해봤자 그녀는 들은 척도 안하리라.

“...그래. 네 인생에 이래라저래라 할 처지는 아니지.”

로잔나는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헬가를 노려봤다.

“나도 복수를 하는 것에 회의적인 입장은 아니야. 원한을 갚는 것은 개인은 물론 집단으로 봤을 때도 무척 중요한 일이지. 하지만... 네 친구가 슬퍼할 만한 짓은 하지 마.”

로잔나의 투명한 눈동자에 헬가가 쥔 푸른 창이 비췄다.

“크메르사트는 한심하게 자신이 죽었다고 축 쳐져 있는 것보다 이게 나답다며 좋아할 거야.”

크메르사트의 사념이 깃든 헬가의 창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래... 그럼 약속하나만 해. 죽지 마. 그리고 다시 돌아와.”

한참 동안 대답을 헤맨 헬가가 힘없이 처진 미소를 지으며 겨우 입을 열었다.

“...응.”

2

로잔나는 헬가가 떠난 이후에도 한참 동안 크메르사트의 무덤을 지켜봤다. 자신이 몸조심하라 해봤자 그녀는 결국 자신의 몸을 버려가며 싸우리라. 그렇기에 로잔나는 구태여 언급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계속 옆에서 정답을 말해줘 봐야 사람은 성장하지 않는다. 한 번 크게 데이고 나서야 보이는 것도 있을 것이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하는 법이지.”

동굴의 입구를 어루만진 로잔나는 그대로 사르디나로 돌아갔다. 사르디나의 전역은 떠들썩한 축제가 몇날며칠 지속되고 있었다.

헬가도 이곳에 있었으면 축제가 더욱 즐겁지 않았을까.

‘아니... 헬가 만이 아니라 크메르사트도...’

로잔나는 고개를 저으며 쓸데없는 공상을 떨쳐냈다. 무의미한 망상이었다. 한참 우울한 분위기를 띠우며 걷고 있자 축제 분위기에 감화된 주민들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자신들의 통령을 알아보지 못한 그들은 로잔나의 손에 간식거리를 잔뜩 쥐어주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어린아이의 기운을 북돋기 위한 말은 결국 영웅들과 통령에 대한 찬가로 까지 이어졌다.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온 로잔나는 그 어이없는 상황을 떠올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헬가가 무사히 돌아오면 축제를 열자.

‘아니지. 너무 거창하게 하면 헬가가 부담스러워 하려나?’

로잔나는 언젠가 찾아올 헬가와의 재회를 고대하며 통령으로서의 업무에 힘썼다. 사람들의 즐거움과 비례해 그녀의 업무는 끊임없이 늘어났다.

3

붉은 비늘을 가진 용은 자신의 날개를 빼앗은 상대를 쫓아 숲으로 향했다. 날개를 잃고 자랑스런 비늘이 유리처럼 바스라진 용은 성난 황소처럼 숲을 들이 받았다. 십 수 미터에 다다른 거대한 괴물의 침공에 잔잔히 노래하던 한 밤의 숲이 삽시간에 시끄러워졌다. 숲을 지배하던 몬스터들조차 용이 흘리는 살기와 비산하는 마력에 겁먹어 자신들의 터전을 버리고 도망치기 급급했다.

용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거대한 입을 벌렸다. 그의 입에 뿜어진 사나운 화염이 게걸스럽게 숲을 잡아먹었다. 용은 분노로 이성을 잃었다. 입 안을 난자한 상처가 불에 짓이기는 고통조차 그를 제정신으로 돌려놓지 못했다. 자존심 강한 용은 인간 하나에게 농락당하는 이 순간을 견딜 수 없었다. 짙은 굴욕과 자괴가 그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용은 어둠에 숨어 자신의 뒤를 노리는 사냥꾼을 놓쳤다.

-헬가아아아아!!

그는 마도대전 당시 어리석은 용과 함께 자신들의 앞을 막아섰던 존재의 이름을 불렀다. 비명과도 같은 외침 속에서 헬가의 모습이 들어났다. 헬가의 푸른 창끝이 용의 비늘을 꿰뚫었다.

-크아아아아!

고통에 찬 비명과 함께 용이 마구잡이로 꼬리를 휘둘렀다. 헬가는 꼬리 공격을 피해 화염 속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그녀를 둘러싼 로브가 화염 속에서도 원활히 움직일 수 있게 도와줬다. 날개에 이어 다시 한 번 기동력을 잃어버린 용은 겁먹은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화염 속으로 숨어든 그녀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았다. 도망치고 싶어도 용으로서의 자존심과 힘줄이 끊어진 다리가 방해됐다. 꼬리와 팔을 과장되게 휘둘러 숲을 쳐냈다. 과장된 몸집으로 겁먹지 않았다는 걸 표출했다. 저 멀리 불타는 숲 사이로 푸른 창끝이 반짝였다. 순간적으로 팔을 들어 매섭게 날아든 투창 공격을 막아냈다. 그녀의 위치를 포착한 용은 마력을 담아 목을 울렸다.

-한낱 버러지가-!

드래곤 피어Dragon Fear.

자신보다 나약한 존재의 육체의 자유를 빼앗고 정신을 마비시키는 기술.

하지만 헬가는 그 외침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땅을 박차고 내달렸다.

‘말도 안 돼!’

드래곤 피어를 사용함으로서 그가 부정하고픈 사실을 시인한 꼴이었다. 순식간에 서로의 거리를 좁힌 헬가는 팔에 박힌 창을 여유롭게 뽑아냈다. 그 상태로 용의 팔을 밟고 뛰어올라 몸을 공중에서 회전시켰다. 자신의 피어에 역으로 잡아먹힌 용은 공포에 얼어붙어 그 부드러운 동작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헬가는 창을 내리찍듯이 휘둘렀다. 회전력까지 더해진 창은 어려움 없이 용의 콧잔등을 베어냈다.

-크아아... 크륿읅...

비명을 지르려던 용의 목에 창을 찔러 넣었다. 울컥 쏟아지는 핏물에 비명 소리가 잠겼다. 헬가가 창을 빼내자 용이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용에서 흘러나온 피가 작은 웅덩이를 이루었다. 불타버린 숲이 조금씩 피를 빨아들였다. 헬가는 끼얹어진 용의 피를 천천히 닦아냈다. 용은 죽는 순간까지 꺽꺽거리며 두려움에 가득 찬 시선으로 헬가를 바라봤다. 헬가는 굳이 목숨을 끊어 고통을 줄여주는 자비를 내려주진 않았다.

과거의 용을 동경하던 소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불타오르는 복수심을 주체하지 못하는 전사만이 그곳에 자리했다. 헬가는 창을 죽은 용의 심장에 찔러 넣었다. 붉으스름한 용의 기운이 푸른 창에 조금씩 스며드는 것이 보였다. 창이 부르르 떨렸다. 헬가는 그것이 크메르사트가 기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품에서 꺼내든 스크롤을 찢자 푸른 섬광이 주위를 비췄다. 이것으로 미리안드에게 이곳의 위치가 전해지리라.

창을 휘둘러 피를 털어낸 헬가는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한 전우에게 지금의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진 않았다. 불타는 숲 너머로 사라진 그녀는 또 다른 용이 있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4

검은 피막 날개를 펼쳐 날아오른 용은 자신이 레어로 삼은 산처럼 높은 암굴의 정상에 올랐다. 똬리를 튼 흑룡은 고개를 빼내어 붉게 물든 태양이 천천히 땅 아래로 침잠해 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제 조금만 더 기다리면 태양은 달에 밀려 저 아래로 완전히 사라진다. 하늘이 검게 물들고 별 하늘이 반짝이는 시간은 자신의 세상이었다. 그는 자신과 세상이 동화되어 가는 모습을 좋아했다. 언제나 이 시간대만 되면 포근한 암굴에서 벗어나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르르.

기분 좋게 목을 울리며 점점 어둑어둑해지는 하늘을 올려보았다. 똬리를 튼 몸을 풀고 날개를 펼치며 천천히 날아오를 준비를 끝마쳤다. 이내 태양이 완전히 가라앉고 흑룡이 천천히 날개짓을 했다.

그 순간.

사냥감의 목을 노린 사냥꾼의 모습이 들어났다. 흙더미 속에 숨어있던 헬가는 곧장 흑룡의 날개를 찢어발겼다. 한 쪽 날개를 잃은 흑룡의 몸이 균형을 잡지 못하고 땅으로 추락했다.

근 한 달 간 헬가는 오로지 저 흑룡을 잡기 위해 그를 관찰했다. 그가 가장 방심하는 때는 저녁과 밤의 경계, 하늘로 날아오르려고 하는 찰나였다.

낮에는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암굴에서 생활했고 밤에는 레어에서 벗어나 밤하늘을 유영했다. 밤하늘을 헤엄칠 때 마다 행복한 표정을 짓는 그의 모습에 구역질이 났다.

대부분의 용들은 2차 마도대전에서 옛 지배자들의 편에 섰다. 헬가는 강자에게 굴복하는 것이 결코 부끄러운 일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옛 지배자들과 마주했을 때, 추악하게 타락했다 욕하던 용들이 현명한 선택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을 죽이고 전쟁을 끝낼 거라며 자신만만하게 웃던 전사는 그곳에 없었다. 잔뜩 겁먹고 움츠러든 어설픈 창잡이가 서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결국 옛 지배자들은 모두 죽고 전쟁은 끝났다. 하지만 용들은 전쟁이 끝난 이후 어떠한 책임조차 지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옛 지배자들이 오기 이전으로 돌아가 행복한 삶을 영위했다.

크메르사트는 죽고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다. 그런데 정작 그녀를 죽인 이들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편안히 살아가는 모습을 용서 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헬가는 용들을 사냥하고 다녔다.

자신의 피가 기억하고 있는 용들을.

-헬가.. 슈미트!

헬가는 용들 사이에서 여러 이름으로 알려졌다. 푸른 용의 파트너. 옛 지배자들을 쓰러뜨린 열 두 명의 영웅 중 하나.

그리고 용 사냥꾼.

몇 년 전 용 사냥꾼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땐 코웃음 치며 부정했다. 하지만 소문은 빠르게 구체화되기 시작하고 연락이 끊기는 용들이 하나 둘 씩 늘어갔다. 용 사냥꾼의 정체를 알았을 때도 용들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자기는 당할 리 없다는 오만함과 다른 용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 싫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소수의 용은 희생이 있더라도 그녀를 쓰러뜨려야 한다고 판단했고 그녀와 조우했다면 시간을 끌고 서로를 부르기로 약속했다.

흑룡은 지면을 구르면서 재빠르게 주문을 외웠다. 일종의 신호탄이었다. 남은 건 그들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흑룡의 처절한 저항이 시작됐다. 가까이 다가가면 불안정한 날개로 도망쳤다. 공격을 하기 보단 회피와 방어에 치중했다. 덫을 깔아둔 곳으로 유인하는 것도 마땅치 않았다.

‘시간을 끌어봐야 좋을 것 없을 텐데.’

헬가의 공격은 전혀 무뎌지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용과 다름없었다. 헬가는 다리와 날개를 집요하게 노렸다. 용의 힘으로 벼려진 창이 서서히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흑룡의 목에 창을 찌르려는 순간. 헬가는 몸을 비틀어 뇌전의 창을 피해냈다. 황급히 몸을 돌리자 그곳에는 날렵한 생김세의 금색 비늘의 용이 날개 짓하고 있었다.

‘말도 안 돼...’

크메르사트가 언제나 하는 말이 있었다. 용은 무리를 짓지 않는다. 언제나 홀로 생활하며 다른 용의 위기에도 수수방관하는 놈들이라고. 그렇기에 헬가는 언제나 1대1이라는 걸 전제로 용들을 사냥했다. 하지만 상대가 둘이라면 승산은 없었다. 방금 전 기습도 운이 좋아 피했다.

‘아니, 괜한 생각말자. 아직 할 수 있어.’

흑룡은 거의 죽어가는 상태였다. 서둘러 마무리 하고 저 용을 덫이 있는 곳으로 몰고 가면 둘 모두 사냥할 수 있을지 몰랐다. 흑룡의 거체에 숨어 금빛 용의 주문을 피한 헬가는 창으로 그의 가슴을 찔렀다. 그러나 흑룡의 거센 저항에 창은 심장에 닿지 않았다. 헬가는 금빛 용과 거리를 벌리면서 흑룡의 목숨을 노렸다. 그러나 두 마리의 용을 상대해야 한다는 압박이 서서히 그녀를 무너뜨렸다.

‘움직임이 굼떠 졌어. 제발 조금만 더...!’

이를 악문 헬가의 창이 다시 한 번 흑룡의 심장을 꿰뚫었다.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한 체 흑룡이 쓰러졌다.

-!!

‘됐어!’

회심의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다른 용을 상대하기 위해 곧바로 뒤를 돌았다. 순간 헬가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 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푸른 용이 눈동자에 비쳤다.

“아라곤...!”

아라곤. 배신자 아라곤. 크메르사트와 마찬가지로 옛 지배자들의 대적자였으나 최후의 결전에서 배신해 크메르사트의 숨통을 끊은 장본인. 분노로 속이 뜨겁게 끓어올랐다. 하지만 그들과 싸우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몸을 틀어 곧바로 숲으로 뛰어들었다. 용들이 주문을 외우며 자신을 추격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뒤를 돌아볼 여유도 없었다.

여러 번 마법이 직격했지만 헬가는 발을 멈추지 않았다. 폭발 덫을 설치해둔 곳으로 끌어 들였다. 이내 강렬한 폭발음과 함께 뒤에서부터 작은 폭풍이 헬가의 등을 떠밀었다.

-크아아악!

용들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지면을 여러 번 구른 헬가가 서둘러 몸을 일으켜 세워 내달렸다. 곧바로 푸르스름한 꼬리가 채찍처럼 날아와 헬가를 내리쳤다. 비명대신 핏물이 비집고 새어나왔다. 그러나 헬가는 멈추지 않고 발을 놀렸다.

-원수를 눈앞에 두고 도망치는 거냐, 헬가!!

아라곤의 도발에도 헬가는 발을 멈추지 않았다. 어둠과 숲이 주문으로부터 그녀를 지켰다. 설치해둔 덫이나 지물 또한 철저히 이용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용의 수는 셋으로 늘어났다. 따라잡히고 다시 떨쳐내는 아슬아슬한 추격전이 장시간 이어졌다. 이내 태양이 떠오르고 끝이 다가왔다. 세 마리의 용이 그녀를 골짜기로 몰아세웠다.

더 이상 나아갈 길이 없자 자신의 품속에 있는 스크롤이 떠올랐다. 스크롤을 찢으면 미리안드에게 위치가 전해질 것이고 사체 회수를 위해 이곳으로 텔레포트 해 올 것이다.

[..미리안드라면 날 구해줄 수 있지 않을까.]

-까득.

헬가가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입 안에 쇠 비린내가 퍼졌다. 자기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내 안위를 위해 동료를 위험해 빠뜨리려 하다니.’

후. 짧은 숨을 내뱉었다. 머리에 열이 오른 덕에 반대로 냉정해 질 수 있었다. 아침을 밝힌 태양이 골짜기 아래를 비췄다. 널찍한 골짜기의 폭은 아래로 갈수록 점점 좁아졌다. 태양빛이 함부로 다가서지 못할 정도로 깊었다. 그녀의 생각을 읽은 듯 손에 쥔 창이 격하게 진동했다.

‘걱정 마. 반드시 복수는 해줄게.’

헬가가 창을 위로하듯 다잡았다. 뒤를 돌아 아라곤을 비롯한 세 마리의 용과 마주했다. 창끝은 아라곤에게 향했다.

-이제야 싸울 마음이 생긴 건가, 헬가.

“...배신자 아라곤. 언젠가 반드시 너의 목숨을 받아가겠다.”

그 말을 남긴 후 헬가는 골짜기로 뛰어들었다.

5

골짜기는 생각보다 깊었다. 벽을 박차고 창을 꽂아 골짜기를 내려갔다. 그녀의 예상대로 용들은 쫓아오지 못했다. 겨우 주문 몇 번 날리는 게 전부였다. 사냥감을 놓친 맹수처럼 그녀를 바라 볼 수밖에 없었다. 정점에 이른 태양이 사라지고 다시 떠오를 때까지 몸을 아끼지 않고 달렸다. 자신이 어디로 향하는지 조차 몰랐지만 겨우겨우 추격은 피했다. 그러나 육체도 정신도 한계를 맞이해 쓰러지고 말았다. 겨우 정신을 차리자 온통 새하얀 눈밭이었다.

‘여긴...’

하늘을 올려다보자 옅은 달빛과 별들이 보였다. 날씨나 별자리를 보아 대륙 동부를 벗어나 문레이크로 넘어온 듯 했다. 몸이 완전히 얼기 전에 어서 여기서 벗어나야 했다. 하지만 용들의 추격에서 벗어났다는 안심감 때문일까. 헬가의 몸은 거미줄에 걸린 사냥감처럼 아무리 발버둥 쳐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뭍에 올라온 물고기처럼 제자리에서 펄떡였다.

열심히 발버둥 쳐보았지만 이내 살고자 하는 의지가 날카로운 바람에 조금씩 꺼져갔다.

‘...이런 게 언제까지 이어지는 걸까?’

파르르 떨리는 입술에서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가느다란 숨결이 새어나왔다.

흙더미 속에 숨어 몇날며칠 뜬 눈으로 지세며 기회를 노리는 건 일상이었다. 용 사냥 이래로 언제나 홀로 지냈다. 마음을 다잡기 위해 의도적으로 친구들을 피했다. 외로움과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은 그녀를 점점 괴롭혔다. 유일한 위안은 용들도 자신처럼 혼자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로서 끝이었다.

앞으로는 몇 마리의 용이 합심해올까.

다음에는 과연 그들을 죽일 수 있을까.

답은 금세 나왔다.

‘불가능해.’

자신에 대한 불신과 외로움, 용에 대한 두려움과 편히 쉬고 싶다는 생각이 천천히 뒤섞였다.

구름이 완전히 하늘을 가리고 눈송이가 떨어졌다. 헬가는 자신의 몸이 점점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힘겹게 떠있던 눈이 스르르 감겼다.

‘이대로 잠들면 편해질까.’

분명 편해질 것이다. 전부 헤진 로브 위로 눈이 솜이불처럼 쌓였다. 알 수 없는 따뜻함에 헬가의 눈이 천천히 감기기 시작했다.

푸른 창이 물에 젖은 고양이처럼 거세게 떨었다.

--헬가!

청아한 목소리에 헬가가 눈을 부릅떴다. 이내 자신의 손에서 떨리고 있는 다잡았다. 입술을 깨물고 창으로 몸을 지탱하며 겨우 일어섰다. 이대로 죽는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일들이 허무해질 뿐이다. 아무 의미도 없게 된다.

‘살아야 해!’

그녀의 복수를 위해서라도 아직 죽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맹세해하지 않았던가. 갑작스레 들린 환청 덕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헬가는 창을 지팡이 삼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최소한 이 추위를 피할 곳을 찾아야 했다. 헬가의 몸이 점점 거세지는 눈발에 흐릿해졌다. 이내 헬가는 주위를 완전히 뒤덮는 눈보라 속으로 사라졌다.

6

허스의 아침은 빨랐다. 손님이 거의 오지 않는 이 시기의 여관업은 사냥이라도 열심히 하지 않는 이상 굶어죽기 딱 좋았다. 무기를 챙기고 짐승 모피로 만든 방한구를 둘러썼다. 가죽 비린내가 났지만 추위를 견디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가자 푸엘.”

컹!

평범한 늑대보다 훨씬 덩치가 큰 잿빛 털을 가진 늑대가 해맑게 대답했다. 허스가 문을 열자 세상이 온통 희게 변해있었다. 산에 홀로 덩그러니 놓여있는 하스의 여관이 옥에 티처럼 보였다. 겨울의 야산은 태양빛에 비춰 곳곳마다 수정처럼 빛이 났다.

“흠... 어젯밤 눈 폭풍이 와서 그런지 흔적이 다 지워졌군. 덫도 거의 다 확인 해 봤고... 이제 그만 돌아갈까?”

아쉽게도 덫에 걸린 동물들은 없었지만 푸엘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토끼 세 마리를 사냥해 왔다. 내일은 부디 사슴이라도 잡히길 바라며 여관을 향해 돌아갔다. 푸엘은 허스보다 한 발자국 앞서 눈길을 걸었다.

으르르! 컹컹!

“뭐야. 왜 그래?”

갑작스레 푸엘이 날카롭게 짖어대자 허스가 서둘러 달렸다. 그곳에는 사람 한 명이 널브러져 있었다. 눈에 뒤덮여 막대 하나와 얼굴, 팔뚝만이 간신히 삐져나와 있었다.

“시첸가? 그만 가자, 푸엘. 아침부터 시체를 보다니 재수도 없군.”

꼴을 보아하니 어제 눈보라가 휘몰아쳤을 때 조난을 당한 모양이었다. 뒤덮인 눈을 쓸어냈다. 숨도 쉬는 것 같지 않았고 맥박도 느껴지지 않았다. 겉에는 얇은 로브 하나만 걸치고 있었다. 이러니깐 뒤지지.

끄응. 끄으응.

허스는 그대로 자리를 피하려고 했으나 푸엘이 끙끙거리면서 그를 막았다. 그리곤 시체의 주위를 맴돌았다.

“푸엘. 이 녀석아. 이런 산중에, 저런 꼴로 돌아다닌 걸 보면 분명 평범한 사람은 아닐 거다. 필시 도망자겠지. 나도 도와주고 싶어도 이런 일엔 함부로 엮이지 않는 게 좋아. 잘못하면 너랑 나 둘 다 크게 다칠 수도 있어. 우리가 죽으면 그 여관은 어떻게 되겠니. 기껏해야 산적들 집합소가 될 거다. 그래, 아주 최악이지. 푸엘. 똑똑한 너라면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지?”

구태여 시체를 뒤져보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계속되는 재촉에 푸엘이 안절부절 한 표정으로 그와 시체를 번갈아 쳐다봤다. 이내 푸엘이 축 처진 체 허스에게 다가간 순간, 눈에 묻혀있던 막대가 진동했다. 푸엘이 깜짝 놀라 눈을 파내자 막대의 전신이 들어났다. 사람의 키만 한 창대에 용의 이빨처럼 날카로운 푸른 창두(槍頭)가 달려있었다.

“저건...”

단 한번. 허스는 저 창을 본 적이 있었다. 떠올리기도 싫어지는 끔찍한 전쟁의 기억. 그 속에서 자신을 구원해 주었던 창이었다.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재빨리 푸엘을 도와 시체를 파냈다. 눈에 파묻힌 은빛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틀림없어. 헬가... 슈미트.”

멀리서 잠깐 본 것이 전부였지만 똑똑히 기억했다. 그녀의 맹수 같이 거칠면서도 호쾌한 싸움은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몸에 걸친 경갑은 깨졌고 여기저기에 핏물이 얼어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 영웅이 이런 꼴을...’

“으윽...”

허스가 당황하고 있을 때 갑작스레 헬가가 앓는 소리를 내며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죽어있던 게 아니었나. 심장박동이 너무 약했던 걸까. 허스가 황급히 헬가를 들쳐 맸다. 푸엘이 창을 입에 물었다.

‘잠깐.’

상황을 보아 헬가는 누군가에게 공격을 당하고 겨우 목숨을 부지해 이 산으로 도망쳐 온 것이 분명했다. 만약 헬가를 이렇게 만든 존재가 그녀를 쫓아 여관에 찾아온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과연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까? 잘못하면 자신도 죽고 여관도 부숴 질지 모른다. 그러나 고민은 짧았다. 그녀가 없었다면 아내와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용의 공격에 당해 그대로 죽었을 테지. 허스는 서둘러 여관을 향해 달렸다.

7

깊게 닫혀 있던 헬가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포근하고 따뜻한 열기가 그녀를 반겼다. 짙은 안개 속에라도 있는 것처럼 눈앞이 뿌옜다.

‘여긴...?’

컹!

납처럼 무거운 몸을 일으키고 옆으로 돌아봤다. 주위의 풍경이 천천히 눈에 들어왔다. 조그만 방 안. 목조 침대. 낡은 테이블과 창문. 그리고 잿빛 색의 커다란 개가 보였다.

“아니 늑대... 윽.”

목소리는 가뭄 든 것 마냥 메말라 있었다. 말을 하자마자 몸의 통증이 밀려들었다. 순식간에 시야가 노래졌다. 숨을 쉬는 것조차 녹록치 않았다. 몸은 미라처럼 붕대로 휘감겨 있었다.

월! 월!

늑대가 문 밖으로 나가더니 개처럼 짖기 시작했다.

‘크메르사트...!’

헬가는 그쪽에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창이 보이지 않았다.

“없어... 없어! 크메르사트.. 우윽. 쿨럭. 쿨럭.”

방을 뛰쳐나가자 목조 테이블과 훤히 들어난 주방, 동물 머리 박제 등이 보였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주방 옆에 마련된 아름다운 벽난로였다. 투박한 내부와는 무척이나 이질적이었다. 저곳에서 흘러나오는 맑은 기운이 건물 내부를 따뜻하게 덥히고 있었다.

‘여관...?’

월!

늑대가 창을 물고 나타났다. 헬가는 눈을 부릅뜨고 황급히 늑대에게서 창을 뺏어들었다. 늑대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목을 울렸다.

“아아... 크메르사트.”

헬가는 창을 손에 쥐자 괴로웠던 몸이 한결 나아진 기분이 들었다. 몸이 진정되자 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제야 곁에서 우울한 눈빛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늑대의 모습이 들어왔다.

“미안해.. 창을 가져와줘서 고마워.”

월월!

늑대의 눈이 반달처럼 휘었다. 꼬리가 좌우로 격렬하게 흔들렸다. 늑대 특유의 긴 다리와 날렵하게 튀어나온 주둥이가 아니었다면 완전히 개로 착각했을 것이다.

“깨어나자마자 돌아다니는 걸 보니 몸 상태가 썩 괜찮은가보군.”

산적처럼 생긴 남자가 눈을 털어내며 들어왔다. 순간 손에 쥔 창에 힘이 들어갔지만 허리에는 작업용 덧옷을 치마처럼 두르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몸은 완전히 전사의 것이었지만 여관의 주인인 모양이었다.

“내 이름은 허스요. 이 여관의 주인이지. 대충 일주일 전 쯤 산길에 쓰러져 있던 걸 발견했지.”

“아... 감사합니다. ...죄송하지만 사례는 나중에 드려도 될까요? 지금은 가진 것이 없어서.”

“그건 안 되겠는데.”

“예?”

“생명의 은인에게 돈을 받는다니 그런 짓을 했다간 아내에게 그 무슨 무례한 짓이냐고 한소리 들을 거요.”

헬가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허스가 크큭 웃으며 대답했다.

“2차 마도대전 말이오. 나도 거기에 참전 했수다. 용병대 대장이었지. 그러다가 용의 공습에 용병대가 전멸해서 나도 꼼짝 없이 죽는 줄 알았는데 당신과 푸른 용 덕분에 살아남았지. 이것도 그 때 얻은 상처지.”

허스가 약지와 소지가 없는 왼 손을 내보였다. 헬가의 얼굴이 순식간에 침울해졌다. 전쟁이 끝난 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씩 꿈에 나와 전쟁에서 죽은 이들이 아른거렸다. 미숙한 자신 때문에 지키지 못했던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다.

“...죄송합니다.”

“뭐가 말이요?”

“용병대 분들을 지켜드리지 못해서...”

“뭐요? 푸하하하!”

허스가 크게 웃었다. 푸엘이 제 주인을 따라 헥헥거리며 웃었다.

“당신이 그런 얼빠진 소리나 하는 사람인 줄은 상상도 못했군.”

“예?”

“용병은 죽음 속에서 살아가는 족속들이지. 언제 죽던지 불평을 놓을 입장이 아니란 소리요. 하물며 온 대륙이 난리가 난 전쟁이었지. 누군가가 다른 이들의 죽음에 책임을 질 일이 아니지. 아 혹시 옛 지배자들이 나온 게이트를 연 게 당신이요?”

헬가가 사색이 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뭐 책임을 느낄 필요도 없지. 뭐.. 오늘 처음 본 내가 이렇게 말한 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만. 이런 내 정신 좀 보게. 환자를 계속 새워두고 있었군. 앉아서 기다리시게. 금방 뭐라도 만들어주지.”

허스가 곧바로 주방을 향했다. 동시에 푸엘이 헬가의 소매를 물고 잡아당겼다. 벽난로 정면으로 보이는 자리였다. 헬가는 당황하면서도 저항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꼬리를 흔들고 혀를 내빼며 헥헥 거리는 게 영락없이 강아지 같았다. 헬가가 조심스레 손을 내밀자 푸엘이 머리를 들이대며 손바닥에 얼굴을 비볐다.

“사람을 잘 따르네요.”

“내 자랑스러운 아들이요. 아주 똑똑한 놈이지. 푸엘이라고 하는데.. 원래 처음 보는 사람은 잘 안 따르는 놈인데 당신이 마음에 들었나 보군. 당신을 처음 발견한 것도 그 놈이었소. 그 놈이 아니었다면 나는 그쪽이 시첸 줄 알고 그냥 내버려뒀을 거요.”

“고마워, 푸엘,”

아우우울.

푸엘이 기분 좋게 목을 울렸다.

벽난로 속에서 아름답게 일렁이는 불꽃의 무리가 포근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8

헬가는 몸이 전부 나을 때까지 여관에 머물기로 했다. 처음에는 곧바로 여관을 떠나려고 했다. 언제 용들이 자신을 쫓아올지 몰랐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이들에게 폐를 끼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상황 설명을 들은 허스는 위협적인 얼굴로 그녀를 만류했다.

“그건 처음 구했을 때부터 각오했던 일이요. 무슨 사정인진 잘 모르겠지만 그 몸 상태로 밖으로 나가봤자 개죽음을 당할 뿐이요. 몸이 전부 나을 때까진 여기에 머물러줘야겠소.”

하는 수 없이 몰래 여관을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밤이고 낮이고 푸엘이 헬가의 곁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한 번은 푸엘을 떨쳐내고 도망가려고 했으나 아직 몸이 다 낫지 않은 탓인지 금방 따라잡히고 말았다. 그 이후로 헬가가 나갈 기색만 보여도 늑대다운 울음소리로 헬가를 위협했다.

으르르!

결국 헬가는 불편한 마음을 가진 체 여관에 머물기로 했다. 푸엘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야산의 절경을 구경하거나 몸이 좀 괜찮아진 이후부턴 여관 일을 돕기도 했다. 익숙하지 않은 여관 일은 무척이나 즐거웠다. 복수를 할 때와는 달리 자신이 진정으로 살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이렇게 행복한 시간을 보내도 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헬가는 멍하니 여관 이름을 바라보았다.

-허스파이어-

야산의 홀로 어색하게 세워진 여관. 헬가가 물어봤지만 허스는 이곳에 여관을 세운 이유를 알려주지 않았다. 그의 표정은 마치 크메르사트를 떠올릴 때의 헬가와 닮아있었다.

“......”

“뭐야. 환자가 이 야밤에 밖에서 무슨 일이야?”

붉은 곱슬머리가 눈을 덮은 남자가 작은 마차를 이끌고 여관에 다가왔다.

“로렌스!”

이 여관에 머물면서 새로 알게 된 친구로 주로 벌꿀주나 향신료를 파는 행상인이었다. 마차를 이끄는 늙은 말이 푸르륵 거리며 헬가를 반겼다.

“이제 거의 완치해간다고 하지 않았나? 그럴 때 일수록 몸 조심해야 하는 법이야. 이제 곧 봄이라도 아직 밤은 추워.”

“이정도 추위는 아무 걱정 없어. 그런데.., 납품일은 사흘 후 아니었나?”

“원래는 국경지대도 한 번 돌고 와야 하는데. 그쪽이 좀 어수선해서 그냥 바로 이쪽으로 왔지.”

“무슨 일인데 그래?”

“아 그게. 용병왕이 용병단을 차례차례 병합시키고 있어. 곧 전쟁이 일어날 거란 소문이 아주 퍼다해.”

“아슬란이?”

9

“그 녀석은 예전부터 용병들이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고 싶어 했어. 경원시되는 용병들이 편히 쉬고 소속감을 가질 수 있는 그런 나라를 말이지.”

아슬란은 언제나 선두에 서서 모두를 지키는 방패였고 가장 밑에서부터 모두를 북돋아주는 사람이었다. 처음 크메르사트가 죽고 실의에 빠졌을 때 정신을 차리게 만들어 준 것도 아슬란이었다. 그라면 좋은 나라를 만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흠... 그럼 아슬란은 정복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리군. 하긴 벌써 2차 마도대전이 끝난 지 몇 년이나 지났으니 큰 전쟁이 한바탕 일어날 때도 됐지.”

허스가 벌꿀주와 향신료가 잔뜩 들어간 사슴 뒷다리로 만든 음식을 내왔다. 로렌스는 자기에게 계속 몸을 비벼 대는 푸엘을 쓰다듬으며 놀고 있었다.

“인석아. 나 이제 밥 먹어야 돼. 내가 좋은 건 알겠지만 이제 좀 나와.”

그러나 푸엘은 비킬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마치 영역표시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 허스가 피식 웃으며 한 마디 했다.

“늑대들은 원래 자기 몸에 지독한 냄새를 배게 해서 자신만의 개성을 추구한다는 얘기도 있지. 로렌스. 안 씻은 지 얼마나 된 거야?”

“뭐? 진짜?”

로렌스가 푸엘의 양 손으로 얼굴을 붙잡고 물었다.

“푸엘. 솔직하게 말해. 나 그렇게 냄새나니?”

월!

“푸엘이 지독한 게 아주 마음에 든다는 걸?”

로렌스가 옷깃을 코로 가져다댔다.

“이럴 수가! 젠장. 허스 당장 뜨거운 물을 준비해줘!”

로렌스가 황급히 몸을 씻고 나왔다. 후끈해진 그와는 달리 음식은 이미 차갑게 식었다. 로렌스가 컵에 벌꿀주를 따랐다.

“헬가 너도 마실래?”

“아니 사양할게. 허스가 어찌나 극성인지. 몸이 다 나을 때까진 한 방울도 못 마시게 하잖아.”

“흐. 얼굴만 보면 허스가 아버지뻘이긴 하지.”

“로렌스.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밥이나 먹지 그래?”

“아! 잠깐만 기다려봐.”

로렌스가 자신의 방으로 가서 어느 술병을 하나 가져왔다.

“사르디나에서 온 상인에게 받은 아주 비싼 포도주야.”

“이건...”

“뭐야. 먹어본 적 있는 술이야?”

“...응.”

로잔나에게 받고 크메르사트와 마지막으로 나눈 포도주였다. 눈과 코 주위가 시큰거렸다.

“원래는 내가 마시려고 아껴둔 술이지만 너 줄게. 작별 인사 대신이라고 생각해.”

“작별인사?”

“그래. 너 어차피 몸 다 나으면 여길 떠날 거라며. 몸 상태 보니깐 이제 곧 떠날 때가 된 거 같은데... 나는 한동안 여기 없을 거거든.”

“뭐? 행상 일은 어쩌고?”

“아는 상인이 같이 하자고 꼬드겨서 말이야. 한동안 대륙 동부로 가서 종군 상인 노릇 좀 해보려고.”

“야! 네가 없으면 술이랑 향신료 보충은 어떻게 하라고!”

“적당히 아는 놈 대신 붙여 줄게. 돈 떼어 먹을 놈은 아니야.”

“너한텐 믿을 만 한 놈일지 몰라도 나한테는 아니지. 그냥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고 계속 하던 일이나 해.”

눈 먼 화살이 무섭다고 종군 상인은 어쩌면 직접 싸우는 병사들보다 위험한 일일지도 몰랐다. 거칠지만 허스 나름대로 걱정해서 하는 말이었다. 그걸 잘 아는 로렌스도 말없이 벌꿀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걱정 마. 나도 내 목숨 아까운 줄은 안다고. 믿을만한 사람들과 믿을만한 용병단으로 가볍게 한 탕 할 뿐이야. 그래도 죽는다면야 거기까지가 내 운명이었다는 거겠지, 뭐.”

로렌스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사슴 뒷다리를 뜯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위험한 일을 할 필요가 있어?”

고기를 술로 넘긴 로렌스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내가 상인이 되고자 마음먹은 건 마도대전을 겪고 나서부터야. 처음엔 단순히 돈을 벌 자고 위험한 지역을 싸돌아다니는 종군 상인 놈들이 바보 같아 보였지. 하지만 그놈들 덕분에 목숨 몇 번 부지하고, 그놈들한테 산 식량으로 병사들이 악착같이 버티고 버텨서 결국 적들을 막아내는 걸 보고 종군 상인도 전쟁에 빠져서는 안 될 중요한 직업이란 걸 알았지. 그 때부턴 뭐. 그 바보 같은 짓이 좀 멋지게 보이더라. 전쟁이 헛소문이든 아니든 마침 딱 기회도 찾아왔으니 한 번 가보기라도 해야지.”

“...차익거래로 돈 왕창 벌고 싶다는 소릴 장황하게도 풀어 놓는 군.”

“큭. 그런가? 뭐 그냥 단순하게 말하자면 하고 싶은 일이니깐 하겠다는 이야기야. 그게 위험하든 아니든 말이야. 난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 허스 너도 그냥 돈 벌려고 여관을 하는 게 아니잖아? 마을과 동떨어진 야산에 혼자 여관을 차린 걸 보면 뻔하지. 이곳에서 여관을 하고 싶은 이유가 있겠지.”

“......”

허스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표정은 굳어있었지만 마냥 언짢아 보이진 않았다. 새로운 벌꿀주를 딴 로렌스가 헬가에게 물었다.

“헬가. 넌 뭐 하고 싶은 일 없어?”

“하고 싶은 일..?”

헬가는 로렌스의 말에 순간 복수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복수란 하고 싶은 일이 아닌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다음으로 떠오른 것은 친구들을 다시 한 번 만나는 일이었다. 이내 다시 한 번 고개를 저었다. 분명히 하고 싶은 일은 맞지만 로렌스가 물은 것과는 조금 달랐다.

로렌스가 연거푸 술을 마시고 취해 쓰러질 때까지 생각해 봤지만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과거에도 크메르사트와 비슷한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 때도 헬가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 때 크메르사트가 뭐라고 했었더라...’

너무 오래된 일이라 잘 기억나지 않았다. 어느 샌가 로렌스는 방으로 갔고 몇 없던 손님들도 모두 사라져 있었다. 허스는 주방에서 뒷정리 중이었다. 헬가는 꾸벅꾸벅 졸고 있는 푸엘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은 후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잠들었다. 잠들기 직전까지 생각해봤지만 여전히 하고 싶은 일은 떠오르지 않았다.

10

다음 날 아침 로렌스는 일찍 여관을 나섰다. 허스와 푸엘, 헬가가 그를 배웅했다.

“그럼 셋 다 다음에 보자구.”

“네가 살아있다면 말이지.”

컹!

둘의 말에 로렌스가 피식 웃었다.

“잘 가, 로렌스. 다음에 봐.”

“그래. 아! 만약 다음번에 다시 보게 된다면 꼭 알려줘.”

“뭐를?”

“네가 하고 싶은 일말이야.”

로렌스의 말에 헬가가 씁쓸하게 웃었다.

“네가 살아있다면 말이지.”

“큭. 그래. 꼭 말 해줘.”

늙은 말의 투레질 소리와 함께 로렌스의 뒷모습이 점점 작아졌다. 이내 말발굽이 눈을 박차는 소리마저 사라졌다.

로렌스가 떠난 지 며칠 후 소문에 신빙성을 더하듯 용병 손님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다들 전쟁에서 한 몫 벌겠다는 얘기로 떠들썩해졌다. 며칠 지나지 않아 전쟁이 터졌다는 얘기가 들렸다. 로렌스가 걱정되긴 했지만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를 믿는 것뿐이었다.

11

헬가는 마지막 남은 붕대를 풀었다. 여기저기에 흉터가 남아있었지만 몸은 개운했다. 이제 쉬는 동안 떨어졌던 체력과 근력만 다시 붙으면 됐다. 여관에 머물기로 한 약속은 몸이 다 나을 때까지. 이제 헤어져야 할 시간이었다.

“정말 인간 같지 않은 몸이군...”

“네가 만들어준 물약의 효과가 좋아서 그래.”

밤이 되었다. 오늘은 여관에 머무는 손님들이 없었다. 여관주인으로선 아쉬울지 몰랐지만 파티를 하기엔 딱 좋았다. 작별 파티를 위해 허스가 주방에서 분발하고 있었다. 푸엘은 연신 불안한 표정으로 헬가와 허스를 번갈아 봤다. 헬가는 벽난로가 잘 보이는 곳에 앉았다. 일렁이는 불꽃이 마치 요정이 춤을 추는 듯 했다.

허스파이어.

벽난로의 불.

여관의 이름으로 당당히 내세운 것이 이해가 갈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불꽃에 빠져서 멍 때리고 있는 틈에 테이블은 어느 샌가 각종 음식들로 가득 찼다.

“뭘 이렇게 많이 준비 했어?”

“마지막이잖아. 기왕 준비하는 거 성대하게 해야지.”

“뭐야. 밥 먹이고 바로 보내게? 난 내일 낮에 갈 생각이었는데.”

허스가 자리에 앉고 벌꿀주를 각자의 술잔에 따랐다. 로렌스로부터 받은 술은 아직 딸 때가 아니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술을 들이켰다. 푸엘은 자기 몫으로 건네준 고기에는 입도 댈 생각하지 않고 안절부절한 표정으로 식탁 주위를 맴돌았다.

“그래서 여길 떠나면 뭘 할 생각이지? 작별 기념으로 그건 알려줄 수 있지 않겠어?”

“...그래. 못할 말도 아니고 얼마든지 말해 줄 수 있지.”

헬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크메르사트의 죽음부터 복수를 맹세하고 홀로 용들을 사냥하러 다닌 얘기. 그리고 얼마 전 용들에게 당해서 이곳으로 흘러들어온 이야기까지. 허스는 묵묵히 그 얘기를 들으며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붉게 상기된 얼굴로 허스가 입을 열었다.

“복수에는 10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는 말을 들어봤나?”

“뭐?”

“크하하! 당연히 못 들어봤겠지. 내가 방금 만든 말이거든!”

허스가 미친 사람처럼 혼자 실실대며 웃었다. 헬가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언젠가 한 번 물어봤었지? 왜 이런 곳에 여관을 세웠냐고.”

허스는 멍하니 풀린 눈동자로 천장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내 아내는 갈루스 제국 출신 연금술사였지. 나한테는 참 과분한 사람이었어. 아내한테 배운 것도 참 많아. 널 치료하기 위한 약제들도 모두 아내한테 배운 거야. 마도대전이 끝난 직후에 처음 만나게 됐는데 그 때 아내는 아직 새끼인 푸엘과 함께 있었지.”

허스가 푸엘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허스는 입버릇처럼 아내를 입에 담았다. 하지만 언제나 지나가는 식으로 말했을 뿐 본격적으로 말을 꺼낸 건 처음이었다.

“예전엔 운명 같은 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전쟁 이후 아내랑 몇 번이고 엮이다 보니 아, 이 사람이 내 운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 그런데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었나 보더군. 아내랑 나는 쫓기는 것 마냥 빠르게 결혼을 했고 아내는 반지 대신 서로를 위한 선물을 나누고 싶어 했지.”

허스가 뒤를 돌아 벽난로를 바라보았다.

“아내는 따뜻해 보인다는 이유로 내 이름을 좋아했어. 아내는 내 이름과 자신의 붉은 머리색을 따 보기만 해도 포근해지는 불을 선물하고 싶어 했어. 허스파이어. 벽난로의 불. 가정의 불. 단란한 가정 속에 있는 것처럼 보기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불을 말이야. 그래서 아내는 이 산에 올라 저 아름다운 불꽃을 만들어낼 재료를 찾았지.”

불꽃은 영롱한 빛을 내며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보기만 해도 마음속이 포근해졌다.

“어쩐지. 마법의 불이었구나.”

“...그리고 아내는 이 여관이 세워진 곳에서 죽었어.”

“...!”

“이 녀석의 코 덕분에 아내를 죽인 놈들을 찾을 수 있었지. 아무도 몰랐을 거야. 이름 있는 범죄 조직이 이 조그만 야산에 숨어있는 줄 말이야.”

허스가 아무도 손대지 않던 식탁의 음식을 하나 둘 먹기 시작했다. 사슴 다리 하나를 모조리 뜯은 후 허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건의 전말은 나도 몰라. 원인은 중요하지 않았어. 알고 싶지도 않았고. 중요한 건 그놈들이 내 아내를 죽였다는 사실이었으니깐.”

“그건... 싸움이라기 보단 사냥에 가까웠어. 덫을 깔고, 유인하고, 범죄자도 기겁할 만큼 비겁한 수단까지 써가면서 죽였지. 하지만 놈들을 모두 죽였어도 아내가 죽었다는 분노는 식지 않았지. 결국 분풀이로 그놈들이랑 연관된 범죄자 놈들을 하나 둘 차례차례 박살내면서 돌아다녔어.”

언제나 곧게 솟아있던 푸엘의 귀가 축 늘어졌다. 얼굴에는 수심이 감돌았다.

“그리고... 그리고 어떻게 됐어?”

“어떻게 되긴... 아무것도 안 남았지. 처음에 놈들을 하나 둘 죽일 땐 좋았어. 아내의 복수를 점점 이뤄내고 있다는 사실이 기뻤지. 놈들을 모조리 죽이고 나면 아내를 잃은 슬픔도 사라질 줄 알았어. 흐흐. 근데... 오히려 슬픔만 더 커지더군.”

“그럼 넌... 복수 한 것을 후회해?”

“전혀. 애초에 난 용병이 되기 전에도 된 후에도 저급한 삶을 살아가던 쓰레기 같은 녀석이었어. 거기서 복수마저 안했다면 난 진짜 쓰레기가 됐겠지. ...질문 하나 하지. 넌 복수가 끝나면 너한테 남는 게 뭐라고 생각해?”

“...”

헬가는 허스의 말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하지만 떠오르는 대답은 없었다.

“그래. 복수 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아. 소중한 사람은 이미 죽었으니깐.”

“하지만...!”

“복수를 하는 게 의미 없는 일이라고 하는 게 아니야. 아까 말했듯이 나는 복수를 후회하지 않고 복수는 남겨진 자에게 아주 중요한 거라 생각해. 하지만... 복수만을 바라봐선 안 돼. 복수를 삶의 목표와 원동력으로 삼는다면 복수를 마치고 나선 그 사람에게 아무것도 남지 않게 돼.”

“나와 푸엘은 말 그대로 폐인처럼 살았어. 밥 먹고 잠자고 볼일 보고... 그 이상은 하지도 못했고 할 염두도 못 냈어. 산다는 것 자체가 귀찮아지고 행복하게 웃는 놈들이 짜증났지. 나랑 너는 복수의 대상도 다르지만... 소중한 이가 죽어서 미친 듯이 그 복수에 매달린다는 점은 똑같지. 아마 너도 복수를 마친 후엔 나처럼 될 거다.”

허스의 말에 헬가는 한참동안 가만히 있었다. 허스가 말을 이었다.

“복수를 포기하란 소리는 아니야. 아까도 말했듯이 복수는 언제해도 늦지 않아. 네가 그럴 마음만 간직하고 있다면 말이야.”

“그러면 넌... 그걸 어떻게 극복했어?”

헬가의 말에 허스가 싱긋 웃었다.

“한참 여관에서 술이나 퍼마시면서 허송세월을 보냈을 때 우연찮게 아내의 유품을 정리할 때 함께 챙겨두었던 저 불의 레시피를 봤어. 처음에는 고작 이런 거 때문에 아내가 죽었다는 생각에 당장 찢어버리려고 했지만... 아내가 남긴 마지막 물건이라는 생각에 결국 못 찢고 말았지.”

허스가 주머니에서 낡은 종이뭉치를 꺼내들고 헬가에게 내밀었다. 둥글둥글한 글씨체로 마법의 불 제조법과 일지가 적혀 있었다.

-허스파이어-

재료-......

x월xx일

드디어 성공! 이제 재료만 다시 모아서 만들면 돼!

남편은 선물로 뭘 준비했을까? 괜히 호구 잡혀서 쓸데없이 비싼 거 사오지만 않았으면 좋겠는데.

...

..

x월xx일

이런 멍청한 연금술사를 봤나!

불을 선물해 줘도 그걸 어디다 보관할 건데!

...

..

x월xx일

떠돌이 생활도 지쳤는데 이참에 확 정착해볼까?

집이 생기면 벽난로에다가 불을 넣으면 되겠지.

좋아! 그렇게 하자! 이왕이면 여관업이나 할까.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 불꽃을 자랑하고 싶다! 이 사랑의 결정체를!

여관을 짓는다면 당연히 사람들이 이 멋진 불꽃에 매료될 테니까 여관 이름도 허스파이어로 짓는 게 좋겠어.

음... 허스가 허락하려나? 원체 떠도는 걸 좋아해야 말이야.

우선 재료부터 모으고 물어보자!

“내가 여관을 세우기로 결심한 건 그 일지를 보고 나서부터야. 아내가 마지막으로 원했던 소원을 이뤄주고 싶었지.”

말을 마친 허스의 눈에 허스파이어처럼 포근한 기운이 감돌았다. 로렌스와 나눴던 이야기가 다시금 떠올랐다. 결국 허스와 푸엘은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았기에 극복할 수 있었다. 크메르사트와 만나기 전까지는 강한 전사가 되고 싶었다. 옛 지배자들의 침공이 시작된 이후에는 그들을 쓰러뜨리고 평화를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복수만을 바라보던 지금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헬가가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자 허스가 너털웃음을 치며 말했다.

“뭐 갑자기 복수만을 바라보던 사람한테 그러지 말라고 해봤자 머리만 복잡해질 뿐이지. 크흐흐. 생각의 전환이라도 시켜줘?”

“...뭔데?”

“넌 지금 네 몸뚱이를 망가뜨려가면서까지 복수를 하고 있지. 과연 그걸 죽은 네 친구가 기뻐할까? 잘했다면서 등이라도 두들겨 줄 거 같아?”

“...! 그건...”

“넌 네가 죽고 나서 네 친구들이 자기 몸 버려가면서 까지 자신의 복수를 해주는 걸 기뻐할 수 있어?”

순간 헬가는 로잔나와 헤어지기 전, 대수롭지 않게 흘려 넘긴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네 친구가 슬퍼할 만한 짓은 하지 마.]

필시 로잔나가 말했던 것 이 문제였을 것이다. 처음부터 똑바로 말해줬으면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래봤자 나는 그 말을 무시했겠지.’

헬가는 왼편에 두었던 창을 조심스레 쓸었다. 근래에 창이 반응해주는 일이 잦아들었다. 마냥 복수를 기뻐하는 줄 알았던 창의 떨림이 새삼 다르게 느껴졌다. 창속에 남겨진 크메르사트의 사념이 지금까지 계속 자신을 걱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심해.’

“헬가. 넌 의지를 다지기 위해 친구들을 안 만나고 있다 했지. 하지만 넌 지금 굉장히 지친 상태야. 이대로 복수를 계속 해봤자 너는 실패하고 죽을 거다. 다시 친구들의 곁으로 돌아가서 쉬어라. 그리고 정 복수가 어렵다고 생각하면 친구들에게 도와달라고 해봐. 넌 인간과 용의 전쟁이 시작될 거 같아서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고 했지. 하지만 내 생각은 달라. 너는 그냥 또다시 용들에게 친구가 죽는 게 무서울 까봐 거절한 거야.”

“......”

“하지만... 그건 네 친구들도 마찬가지 일 거다. 네 의지를 존중해서 나서진 않았지만 굉장히 걱정하고 있겠지. 너도 용들에게 죽을까봐. 하지만 네가 도움을 청하면 소매 걷어붙이고 당장 나설 거다. 난 네 친구들에 대해 전혀 모르지만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는 꽤 들었지. 그리고 설마 옛 지배자들을 물리친 영웅들이 도마뱀 따위에게 당하겠어?”

허스의 장난스러운 말에 헬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자신이 과연 그들에게 뻔뻔스럽게 부탁해도 될까하는 의문이 맴돌았다.

“마냥 농담으로 한 말도 아냐. 이제 용들도 뭉치기 시작했다면서? 혼자 싸우는 게 힘들 거 같으면 너도 동료를 모아 대항하는 수밖에 없지. 뭐 나야 싸움에는 도움이 안 될 테지만 지치면 언제든지 와. 밥이랑 술은 얼마든지 줄 테니깐.”

“...고마워.”

“푸엘. 너도 언제까지 그렇게 축 쳐져 있을 생각이야? 헬가가 영영 헤어진 다냐? 기회만 되면 언제든지 다시 만날 수 있어. 안 그래?”

푸엘이 목을 슬프게 울리며 헬가를 올려다보았다. ‘정말?’이라고 묻는 듯한 표정이었다.

“...물론이지. 푸엘. 너희에겐 큰 은혜를 입었어. 특히 네가 없었다면 나는 설산에서 그냥 죽고 말았을 거야. 고마워.”

헬가가 푸엘을 가볍게 안았다. 푸엘이 헥헥 웃으며 꼬리를 흔들고 얼굴을 핥았다. 얼굴이 끈적끈적해졌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헬가의 작별 파티는 어느 샌가 그녀를 위로하고 미래를 축복하는 자리로 바뀌었다. 술이 잔뜩 들어간 탓인지 아까부터 허스의 말은 많아지고 헬가는 말 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헬가. 넌 로렌스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을 못 했었지. 너무 거창하게 생각 하지 마. 원래 누구나 하고 싶은 일이 뭐냐고 물으면 명확하게 답을 내놓을 사람은 많지 않아. 넌 우선 친구들 곁으로 돌아가서 푹 쉬는 일이나 생각 해. 그리고 답이 나올 때까지 천천히 고민하고 복수로부터 눈을 돌려봐. 용들이 미쳤다고 갑자기 도시로 와서 깽판 치는 게 아닌 이상 시간은 네 편이야.”

“...응.”

음식을 담은 접시와 술병이 하나 둘 씩 비워졌다. 점점 밤이 깊어지고 헬가는 마음속에 응어리져있던 무언가가 조금씩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파티는 갑작스레 끝을 맞이했다.

12

잔해를 밀고 일어난 헬가가 창을 휘둘렀다. 그녀를 향해 날아든 주문의 폭격을 하나 둘 튕겨내고 베어냈다.

“허스-! 푸엘-!”

헬가가 소리쳤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내가 여기서 머물 생각을 안했더라면!’

무의미한 가정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아니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야. 어서 이곳에서 멀어져야 해.’

헬가는 무너진 잔해 속에서 빠져나와 산 정상을 향했다. 설령 둘이 살아있더라도 싸움의 여파로 크게 다칠 것이다. 자신을 쫓아오는 용은 세 마리. 저번에 봤던 용들이었다.

배신자 아라곤과 금색, 초록색의 비늘을 가진 용이었다.

자신이 과연 도망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상처는 전부 회복되었지만 너무 오랫동안 몸을 쉬게 했다. 체력도 근력도 예전 같지 않았다. 게다가 술까지 잔뜩 먹은 상태였다.

-도망치는 것 밖에 재주가 없나 보군.

지난번과 달리 아라곤의 도발이 먹혀 들었다. 다시 한 번 아무것도 못하고 도망칠 생각부터 하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헬가의 움직임이 느려진 순간을 놓치지 않고 용들이 주문을 날렸다. 아슬아슬하게 몸을 틀어 피했지만 강력한 폭풍에 휘말렸다. 헬가는 지금 갑옷도 없이 평상복을 입은 상태였다. 한 방이라도 직격하면 위험했다.

하지만 아무런 저항 없이 도망 다니기만 해선 그냥 당할 뿐이었다. 헬가는 뒤를 돌아 용들과 마주했다. 헬가는 그대로 커다란 나무 기둥을 타고 올랐다. 나무 기둥을 박차 땅과 가장 가깝게 날던 초록용을 향해 뛰어들었다. 거대한 날갯죽지를 창으로 베어냈다. 갑작스런 헬가의 반격에 당황한 용은 그대로 공격을 맞았다. 헬가는 집요하게 초록용을 괴롭혔다. 반대편 날개를 꺾고 다리를 공격했다.

헬가의 노림수대로 초록용이 날지 못하게 되자 용들이 마법을 사용하는 횟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자칫 잘못하면 동족이 공격의 여파에 휘말릴 수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도망칠 기회가 높아졌을 뿐 저들에게 이길 승산이 생긴 건 아니었다.

‘이대로 셋 모두 날개를 없애고 도망칠 기회를 노린다!’

셋 모두의 날개를 빼앗는다고 해도 승산은 거의 없었다. 중요한 것은 저들을 적당히 유인하고 몸을 빼는 것이었다. 날개를 잃고 땅에 추락한 초록용은 점점 냉정을 잃어갔다. 틈을 노려 눈에 창을 찔러 넣었다. 보석처럼 아름답던 눈동자가 붉게 터졌다.

-크아아아악-!!

초록용이 얼굴을 거세게 흔들며 헬가를 떨쳐냈다. 유유히 착지한 헬가가 얼굴에 조소를 흘렸다.

“나를 잡겠다고 당당하게 온 것치곤 별 것도 없네?”

-흥. 떨리는 목소리로 허세를 부려봐야 아무 소용없다.

-헬가아아!! 버러지 같은 인간이 감히!

초록용이 주문을 외우자 나무의 뿌리들이 땅 위로 들어났다. 뿌리들은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헬가를 향해 쇄도했다.

“그 버러지 같은 인간에게 너희 용족이 얼마나 죽었는지 잊었어? 너희가 저항도 못하고 가벼운 머리를 조아리고 발바닥을 핥았던 옛 지배자들을 쓰러뜨린 게 누군지 몰라?”

역으로 파고든 헬가가 창을 휘둘러 뿌리를 걷어냈다.

-용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용기사 주제에 입은 잘 놀리는 군.

“배신자 아라곤. 너처럼 추한 용은 그 어디에도 없을 거다. 본인이 맹세한 약속을 저버리고 전우를 죽음으로 몬 추악한 도마뱀 새끼.”

헬가가 창을 던져 금빛용의 날갯죽지를 꿰뚫었다. 용의 장점인 거체는 커다란 과녁판에 불과했고 빠른 비행 속도는 한 자리에 머물러 싸울 때는 무의미했다. 한 쪽 날개가 찢어진 금빛용이 균형을 잡지 못하고 땅으로 처박혔다. 흙먼지가 헬가를 가려주는 사이 창을 회수해 다른 한 쪽 날개를 찢었다. 이제 하늘을 나는 건 아라곤 뿐이었다. 두 마리의 용은 도마뱀마냥 팔다리로 땅에 섰다.

‘처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운이 좋았어.’

잘못하면 창을 잃고 그대로 역습 당했으리라.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도박이 성공해서 다행이었다. 헬가가 숨을 헐떡이며 용들을 도발했다.

“너희는 그렇게 땅바닥을 기는 모습이 어울려.”

-우리를 얕보지 마라, 헬가!

초록용이 악에 받쳐 소리쳤다. 아라곤이 순식간에 목을 부풀리고 푸른 냉기를 토해냈다.

“무슨...!”

봄을 맞이했던 야산이 겨울로 돌아왔다. 떨어진 날개를 엄폐물 삼아 공격을 피했다. 그러나 유리처럼 날카로운 냉기가 순식간에 헤집고 들어왔다. 명백히 아군 두 명을 휘말리게 하는 공격이었다. 얼어붙은 피막날개가 산산조각 났다.

-헬가아아!!

비늘에 서리가 맺힌 초록용이 주문을 외웠다. 거대한 가시 넝쿨이 자라나 헬가에게 매섭게 날아들었다. 뒤에선 금빛용이 뇌전의 창을 쏘았다. 땅을 굴러 겨우겨우 두 공격을 피해냈다. 서로의 공격이 서로에게 직격했다. 그러나 용들은 두려움 없이 다시 한 번 헬가에게 마법을 쏘았다.

헬가가 몸을 사리지 않고 용을 사냥했듯 저들 또한 서로를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헬가 만을 노리고 공격했다. 거대한 몸이 서로를 얽혔지만 날카롭게 벼려진 공격은 헬가를 향해 곧게 뻗었다. 반격은커녕 그들의 공격을 피하는 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셋의 기동력을 빼앗는 것은 포기하고 그냥 도망치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아직 날개를 잃지 않은 아라곤이 자신을 쫓아오겠지만 아라곤 하나라면 아슬아슬하게 도망칠 수 있을지 몰랐다.

-여관에서 남자와 늑대 한 마리와 웃고 떠드는 걸 봤다. 꽤 친해 보이더군. 여기서 도망친다면 그들을 죽이겠다.

헬가의 움직임이 멈췄다. 뇌전의 창이 그녀의 팔을 스쳐지나갔다. 불타는 격통과 함께 마비가 찾아왔다.

-그들이 이미 죽었다면 산 밑의 마을을 불태우겠다.

“...! 용으로서의 자존심은 어디다 버린 거지?”

-네가 말하지 않았던가? 추악한 용이라고. 내가 이제 와서 그런 걸 신경 쓸 거 같나?

헬가는 이를 막 물고 용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헬가의 처절한 저항이 시작되었다. 승산은 없었다. 자신을 사리지 않는 용들은 생각한 것 이상으로 거칠고 야성적이었다. 조금씩 자잘한 상처가 늘어났다.

몸이 냉기로 얼어붙었다. 오른쪽 다리가 뇌전의 창에 꿰뚫렸다. 가시 넝쿨 채찍에 핏물을 쏟았다. 조금씩 눈앞이 흐려졌다. 몸이 제 말을 듣지 않았다. 언제 죽음을 맞이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용들은 헬가를 쉽게 죽일 생각이 없었다. 일부러 틈을 만들고 그녀가 파고 들게 했다. 사냥 훈련을 하는 새끼 고양이처럼 그녀를 농락했다.

헬가의 의식이 점점 검게 물들어 갔다. 자신이 서있는지 쓰러졌는지 조차 판단하기 쉽지 않았다. 얼어붙은 시야 너머로 이제 다 놀았다는 듯 금빛용이 거대한 입을 벌린 체 달려드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헬가의 몸은 맹수를 눈앞에 둔 생쥐 마냥 꿈쩍도 하지 않았다.

-끝났군, 헬가.

흐려지는 의식 너머로 아라곤이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13

-.... 헬가.

-헬가.

낯익은 청아한 소리에 헬가가 정신을 차렸다.

“응? 뭐라고 했어?”

-무슨 생각을 했길래 계속 불러도 대답이 없어?

모닥불이 어두운 밤을 주홍빛으로 비췄다. 아름다운 푸른 비늘을 가진 용, 크메르사트가 꼬리를 살랑이며 헬가를 바라봤다.

“아니 그냥... 얼마 전에 모두 모여 있을 때 얘기 한 게 떠올라서...”

-뭐. 전쟁이 끝난 이후에 뭐 할 거냔 이야기?

“응.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루고 싶은 목표라던가 꿈이라던가... 그런 게 안 떠오르네.”

-뭐야. 고작 그런 걸로 죽을상이야? 이 세상에 확신을 가지고 자신이 하고 싶은 걸 찾은 사람이 몇이나 될 거 같아? 눈앞의 일에 끌려 다니는 게 대부분이야. 그건 좀 더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경험을 하면 자연스레 해결될 문제야.

“그럴까?”

-그래. 뭐 이렇게 말하는 나도 딱히 하고 싶은 일은 없지만 말이야.

크메르사트가 목을 울리며 웃기 시작했다. 한참을 웃던 크메르사트가 입을 열었다.

-헬가. 전쟁이 끝나면 같이 여행을 떠나자.

“여행?”

-그래. 중앙대륙 뿐만 아니라 다른 대륙도 모두 돌아보자. 그렇게 한참을 여행하다 보면 우리가 하고 싶은 일도 찾을 수 있지 않겠어?

헬가는 크메르사트의 말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그러네... 좋아. 서반구뿐만 아니라 시프리에드의 조상이 건너왔다던 동방에도 한 번 가볼까?

살짝 들뜬 목소리로 말하자 크메르사트가 대답대신 눈웃음을 지었다.

14

과거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그래... 그런 얘기를 했었지.’

어두워진 시야에 빛이 돌아왔다. 헬가가 오른손에 쥔 창을 힘껏 쥐었다. 금빛용이 거대한 입을 벌린 체 덮쳐드는 것이 또렷하게 보였다. 헬가가 땅에 쓰러지듯 공격을 피했다. 힘이 거의 들어가지 않은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헬가는 죽고 싶지 않았다. 아직 복수를 끝마치지도 못했거니와 크메르사트와 나눴던 약속 또한 지키지 못했다. 이대로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었다. 마지막 힘을 짜내 몸을 비틀었다. 창을 찔러 황금처럼 빛나는 비늘을 깨부쉈다.

방심이 부른 처사였다.

-크르아아악!

다 죽어가던 사냥감의 반격에 뒤에서 지켜보던 두 마리의 용이 깜짝 놀랐다. 목을 찌른 헬가는 그대로 창 손잡이로 용을 쳐올렸다. 목덜미를 정통으로 맞은 금빛용의 거체가 들썩였다. 죽어가던 사람의 힘이라곤 생각하기 힘들었다.

가슴에 빈틈이 들어나자 헬가는 망설임 없이 창을 뻗었다. 강철갑옷보다 단단한 용의 비늘이 손쉽게 뚫렸다. 비늘을 뚫고 근육을 찢으며 나아간 창끝이 심장에 맞닿았다.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한 체 금빛용의 심장이 터져나갔다. 여느 때처럼 용의 기운이 창에 흡수되었다. 창에 담긴 기운이 헬가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꺼억. 꺽. 꺼어억.

금빛용이 마지막 남은 기운을 쥐어짜 팔을 휘둘렀다. 헬가는 신비로운 감각이 이끄는 대로 용의 기운을 담아 창을 네 차례 휘둘렀다. 푸른 창이 용의 생명력을 한 줌도 남기지 않고 게걸스럽게 잡아먹었다. 용의 기운이 창대를 타고 헬가에게 흘러들어갔다. 얼어붙었던 몸에 감각이 다시 돌아왔다. 자잘한 상처들이 빠르게 치유되었다. 꺼져가던 생명력이 다시금 타오르기 시작했다.

-헬가!!

어느 틈엔가 초록용이 만들어낸 가시 넝쿨 채찍이 사방팔방 덮쳐들었다. 헬가는 다시 한 번 무의식으로 창에 용의 기운을 담았다. 푸른색으로 빛나는 용의 기운이 창끝을 타고 뻗었다. 거대한 원을 그리며 창을 휘둘렀다.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우아했다. 헬가의 공격에 가시 넝쿨이 만들어낸 결계가 허무하게 깨졌다. 가시 넝쿨이 찢겨지자마자 아라곤이 냉기를 뿜었다.

헬가는 냉기를 무시한 체 초록용의 사각을 파고들었다. 한 쪽 눈이 없는 용은 그대로 헬가의 가림막이 되었다. 헬가는 아까의 감각을 다시 되새기며 창을 휘둘렀다. 다시 한 번 용의 생명력이 창을 타고 흘러 들어왔다. 헬가의 몸이 점점 더 기운을 찾아갔다. 이 신비로운 힘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헬가는 자신이 점점 용이 되어가는 듯한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초록용의 목숨이 허락하는 한 헬가는 계속해서 그의 생명력을 탐했다. 이내 초록용의 거체가 쓰러졌다. 내면을 채운 강렬한 기운이 냉기를 거부했다.

“동족이 몸을 부셔가면서 싸우고 있었을 때조차 너는 안전한 곳에서 관망하고 있구나.”

-이미 합의한 일이었다. 저들도 다 이해할 테지.

“웃기고 있군. 바로 상황이 불리해지자마자 도망칠 궁리나 하고 있는 주제에.”

-도망을 치는 건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언제나 최우선으로 둬야 하는 건 자신의 안전이지.

“그래서? 그 잘나신 날개로 도망치실 생각인가?”

-아니. 도망치는 것보다 널 죽이는 게 낫겠어. 네가 살아남아 동료들에게 손을 벌리면 귀찮아 질 테니.

말을 마친 순간 아라곤이 얼음의 창을 만들어 헬가에게 쏘아냈다. 수많은 얼음의 창이 포탄처럼 쏟아져 내렸다. 공격을 피하며 반격의 기회를 쟀지만 마땅한 틈이 보이지 않았다. 인간으론 닿을 수 없는 높이에서의 공중포격. 마땅히 뛰어오를 만한 발판도 없었다. 헬가가 용을 상대할 때 가장 먼저 날개를 노리는 이유였다. 이런 식으로 구도가 맞춰지면 상대를 죽일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헬가가 공중의 적에게 할 수 있는 공격은 투창이 전부였다. 상대는 너무 높이 날고 있었다. 아까와는 달리 창을 회수할 기회는 오지 않을 것이다. 단 한 번 공격이 실패하면 그대로 헬가는 죽게 되리라. 헬가의 의지에 맞춰 창끝에 푸른 기운이 모여들었다. 공격 한 번으로 모든 것을 끝내야 했다.

하지만 아라곤은 쉽사리 빈틈을 내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대지가 얼어붙어 헬가의 움직임에 제약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라곤의 공격이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헬가는 조금씩 초조해졌다. 신비한 기술로 상처가 치유되었다곤 하나 깎여나간 체력이 완전히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제아무리 용이라도 마법을 이렇게 난사해댄 이상 분명 지쳤을 거야.’

그렇게 믿고 싶었다. 얼음의 창이 헬가의 어깨를 관통했다. 흩뿌려진 헬가의 피가 순식간에 얼어붙어 결정을 이루었다. 헬가의 몸이 휘청거렸다. 그 모습에 아라곤이 승리를 예감했다.

-이제 끝이다 헬가!!

아라곤의 가슴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입 안에 냉기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드래곤 브레스. 용들의 가장 강력한 공격이며 가장 자부심이 강한 기술이었다. 흐려져 가던 의식 속에서 헬가는 본능적으로 지금이 기회란 것을 느꼈다. 드래곤 브레스는 강력한 만큼 빈틈이 큰 기술이었다. 창을 들고 아라곤을 향해 조준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나아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상처 안쪽으로 냉기가 파고들었다.

‘이런 젠장...!’

아라곤의 입에서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강렬한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모든 것을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창 안에 잠들어 있던 크메르사트의 사념이 헬가의 몸을 억지로 움직였다. 용의 기운이 어깨를 받치고 팔을 뻗었다.

창이 손에서 벗어나자 그 안에 남아있던 크메르사트의 잔재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크메르사트...!’

창은 용의 형상을 띄운 체 냉기의 폭풍과 격돌했다. 팽팽하게 이어지던 푸른 용 두 마리의 승부는 점점 크메르사트의 쪽으로 기울어졌다. 헬가의 바램대로 아라곤은 이미 지칠대로 지친 상태였다. 아라곤의 드래곤 브레스가 점점 가늘어졌다. 냉기의 폭풍을 뚫고 지나온 푸른 창끝이 아라곤의 머리를 꿰뚫었다.

헬가는 창이 떨어지는 방향으로 힘겹게 달려갔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창을 받아낸 헬가는 그것을 꽉 끌어안았다.

15

허스는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한 정신을 부여잡고 눈을 떴다. 세상이 종말이라도 맞이한 듯 고요했다.

“일어났어?”

귓구멍에 진흙이라도 메운 듯이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시커먼 의식 너머로 길쭉한 인간의 형상이 보였다. 허스는 그것이 헬가라는 것을 금세 눈치 챘다.

“여긴...?”

“산 아래쪽의 마을이야. ...정말 미안해, 허스.”

그리곤 헬가의 설명이 시작되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허스는 너털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됐어. 말했잖아. 너 여관에 머물게 할 때부터 각오했다고. 푸엘도 무사하고 너 쫓아온 용들도 모조리 다 죽였다며? 그럼 된 거지 뭐.”

“하지만 여관이...”

“‘허스파이어’는 다시 만들면 돼. 여관도, 불꽃도 말이야. 나는 아직 살아있으니깐. 정 신경 쓰이거든 나중에 새로운 여관 지을 때나 도와 줘. 이런 때가 아니면 언제 영웅을 막노동에 부려먹을 수 있겠어?”

허스의 위로의 말에 무겁던 헬가의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16

“난 누구랑은 달라서 꽤 오랫동안 요양해야 돼. 내가 나을 때까지 있는 건 그냥 시간 낭비지. 사르디나로 돌아가서 친구들 안심이라도 시켜주는 건 어때?”

허스의 말에 설득된 헬가는 허스와 푸엘과 헤어져 사르디나로 돌아가 크메르사트의 무덤 앞에 섰다. 동굴의 입구를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야... 크메르사트.”

복수를 맹세한 이후로 찾아오지 않았다. 헬가는 무덤 앞에 앉아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할지 계속 지켜봐줘.”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돌았다. 성스러운 빛을 머금은 금실 같이 아름다운 금발과 하늘을 마주하는 듯한 투명한 푸른 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소녀가 눈에 비쳤다. 소녀가 키득거리며 입을 열었다.

“드디어 일어났네? 내가 온 것도 눈치 채지 못 하길래 난 또 무덤이랑 완전히 동화해 버린 줄 알았지 뭐야.”

“로잔나...”

“오랜만이네. 헬가.”

“내가 온 건 어떻게 안 거야?”

“용 세 마리가 마을 근처에서 죽었다는 얘기와 함께 네 소문이 퍼다해.”

로잔나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우리 나눌 얘기가 많지? 따라와. 파티 준비를 해뒀어.”

“...파티?”

“그래. 재회 파티. 원래는 축제라도 열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바로 도망칠 거잖아? 아, 오랜만에 돌아왔는데 뭐 하고 싶은 거라도 있어? 부탁만 해. 통령 자리를 넘겨달라는 것만 아니라면 다 들어줄 수 있어.”

로잔나의 말에 헬가가 멈칫했다. 이내 작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글쎄... 천천히 찾아봐야지.”

“응?”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며 로잔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헬가가 아무것도 아니라며 작게 웃었다. 두 사람은 파도치는 절벽을 따라 도시로 향했다.

17

오랜 시간이 흐르고 마도대전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 때 쯤.

귀여운 생김새와는 달리 살벌한 크기의 할버드를 어깨에 걸친 견인족 소년이 뒤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로드, 저쪽에서...”

안경을 쓴 사제처럼 예의 바르고 단정한 생김새의 기사가 말을 이었다.

“여관 주인이 저희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군요.”

로드라고 불린 이가 여유로운 태도로 대답했다.

“뭔가 느껴지지?”

백발의 엘프 청년이 긴장한 듯 표정을 굳히고 입을 열었다.

“...보통의 여관 주인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붉은 머리카락의 여자가 손에 쥔 도끼를 다잡았다.

“칼로 베일 것처럼 예리한 느낌입니다.”

“마담, 우리에게 볼 일이 있으신지?”

로드가 여관 주인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물었다.

“에구, 이거 무섭구먼. 구경도 못하나? 늙은이는 서럽다네.”

세월에 젖어 색이 바랜 머리를 한 데 묶고 외눈안경을 낀 헬가가 장난스럽게 불평했다. 그녀는 여관에서 천천히 걸어 나와 기사들과 그들의 군주를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