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천한 저희 육신이 닿길 바라며...”

짙은 어둠 뿐인 고요한 천막에 한 무리의 사내들이 모여 의식을 치르고 있다. 길고 날카로운 손발톱을 가졌으며 온몸엔 짐승의 털이 수북한 그들은 플로렌스 왕국의 전투 노예들이다.

“그쯤하고 이제 그만 준비하지?”

어두운 공간을 가르는 빛. 중무장한 병사가 그들을 부른다. 그들은 의식을 그만두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천막 안에 불이 켜지고 그들의 얼굴이 보인다. 인간의 몸이지만 짐승의 털과 개의 얼굴을 한 수인. 탕구르족이 전장에 나설 준비를 한다.

“...평원에 닿게 하소서.”

모두가 몸에 갑옷을 두르고 무기를 손질하러 갈 때 한 수인은 의식을 마친다. 척 보기에도 남다른 체격과 분위기를 풍기는 검은 털의 수인. 루이즈는 탕구르족의 우두머리다. 그때 중무장한 인간 병사가 지시를 내린다.

“한번만 설명할테니 잘 듣도록. 현재 루앙 자작령까지 아발론 놈들이 침투한 상황이다. 네놈들은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끌면 된다. 20분 후 출발한다!”

말 떨어지기 무섭게 분주히 준비하는 수인들. 루이즈도 무기를 챙긴다.

“이번엔 몇이나 죽을까...”

“플로렌스 새끼들, 또 지들 고기 방패나 하라는 거 아냐.”

“이렇게 죽어봐야 개죽음이지 뭐.”

구석에서 수근대는 수인들을 본 루이즈는 성큼성큼 그들에게 다가간다.

“지금 선조들의 명예를 모욕하는 건가?”

“뭣?!”

“우리 탕구르족의 숙명을 잊은건 아니겠지.”

“그..그건...”

탕구르족. 그들은 선천적으로 전투에 능하고 호전적인 종족이다. 다소 지능이 떨어지는 탓에 거대한 플로렌스 제국의 전투 노예로서 싸우고 있지만 그들의 명예는 언제나 올곧다. 그들의 원동력은 오직 하나. 전장에서의 명예로운 죽음으로 사후 ‘선조들의 평원’으로 간다는 믿음뿐이다.

“너무 열내지 말라고.”

루이즈에게 다가오는 붉은빛 털의 수인 베카. 루이즈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베카.”

“어서 가서 준비들 하세요. 얼마 안 남았네.”

베카의 어서 가라는 손짓에 수근대던 수인들은 자리를 피한다. 베카를 노려보는 루이즈.

“아무리 너라도 선조들을 욕보인다면...”

“명예? 좋지~. 저들 모두 평원으로 가고 싶을걸?”

베카는 웃으며 루이즈를 바라본다.

“근데 선조분들께서 지금의 우리를 명예롭다고 봐주실진 모르겠네.”

“그게 무슨...”

“집합이다!! 노예들은 사열대로 집합!!”

플로렌스 병사의 명령에 수인들은 천막 밖으로 나간다. 루이즈의 어깨를 툭툭 치고 말없이 나가는 베카. 루이즈도 의아해하며 행렬에 따른다.

그들의 행렬은 각자 다른 곳에서 멈췄다. 루앙 자작령부터 모라비 관문까지. 각 지역마다 전
투 노예들이 배치됐고 그들은 침입자 아발론인들과의 전투를 준비한다.

모라비 관문에 배치된 루이즈는 주변 수인들의 사기를 북돋아준다.

“우린 이번 전투로 평원에 한걸음 더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선조들께 부끄럽지 않은 전투를 하고 명예롭게 죽음을 맞이하자!”

캬오오오오오!!

수인들의 패기넘치는 함성은 관문 전체를 울렸다.

관문에서 대기한지 얼마나 지났을까. 수인들의 시야에 한 무리의 이방인들이 보인다.

“놈들이다!”

수인들은 재빨리 무기를 꺼내들어 전투 태세를 취한다. 그때 이방인 중 한 사람이 수인들에게 말을 건다.

“난 그대들과 싸울 이유가 없다.”

“저런 헛소리에 넘어가지마라! 모조리 죽여!”

수인들은 루이즈의 외침에 이방인들에게 달려든다.

“음.. 일단 좀 진정시켜야할 필요가 있겠군요.”

노란 머리에 안경을 쓴 남자가 이방인의 대장으로 보이는 자에게 말했다.

“죽이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냐?”

검고 긴 삐죽머리의 소녀가 거대한 창을 들며 말을 보탠다. 그렇게 이방인들과 수인들의 전투가 시작됐다. 전투가 길어질수록 수인들은 의아해했다. 분명 상대는 나이도 어려보이고 몸도 왜소한 자들이 포함된 고작 다섯이었는데 전투력으론 누구에게 꿀리지 않던 수인들이 압도적으로 밀려 모두 쓰러졌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방인들의 공격은 모두 급소를 빗나가는 공격들 뿐이었고, 그걸 느낀 루이즈와 수인들은 분노를 느꼈다.

“지금 우리를 농락하는 거...”

그때 이방인들의 뒤에서 한 무리의 수인들이 나타난다.

“적도.. 적도 전투 노예가 있다!”

뒤에서 나타난 수인들은 앞 지역에 배치됐었던 수인들이었다. 그 수인들 틈에서 베카를 본 루이즈는 베카에게 소리쳤다.

“베카!!! 네 놈 결국!!!”

“모두 들어라!!!!”

이방인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크게 말했다.

“나는 아발론의 군주 로드.”

그의 손짓이 베카를 향한다.

“이들은 한 때 노예였지만, 이제는 아니게 될 것이다.”

당황한 수인들. 루이즈는 반문한다.

“헛소리! 노예는 노예일 뿐이다!”

“그대들은 처음부터 노예로 태어났는가? 그대들이 꿈꾸는 선조의 평원, 그곳에 있는 선조들 또한 노예로 태어났는가?”

“그 더러운 입에 선조들을 담지 마라!!”

루이즈는 분노해 달려들려 했으나 이미 몸은 전투불능의 상태였다.

“태어나 살아온 방식을 바꾸기는 어렵지. 천천히 배워가면 된다. 평원을 향한 그대들의 긍지는 잘 알고 있다. 다만, 삶은 죽음 이후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야.”

로드의 뒤에서 베카가 나와 루이즈와 마주 본다.

“난... 검투 경기장에 나가기 전, 동료들과 얘기하는 시간이 좋았어.”

“베카... 너 이 자식...”

“이 자가 말했어. 그것보다, 더 좋은 것들이 많을 거라고.”

로드는 칼을 칼집에 집어넣고 상냥하게 말한다.

“내가 도와주겠다. 나는 그런 세상을 위해 싸우고 있고, 그대들에게도 알려주고 싶다.”

로드의 얼굴엔 확신이 가득 차있었다. 왠지 모르게 믿음직한 그의 말들에 수인들은 점점 매료되고 있었다.

“누군가를 죽이지 않아도 되고, 누군가에게 죽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삶을 그대들에게 약속하겠다.”

루이즈는 잠시 흔들렸지만, 이내 정신을 되찾고 힘겹게 일어선다.

“아니... 우리의 주인은 플로렌스다. 노예는 주인의 명령에 복종한다!!”

로드에게 달려들려는 루이즈의 앞을 베카와 수인들이 막아선다.

“함께 가자 형제여.”

베카가 진심어린 말투로 내민 손을 루이즈는 결국 무기를 내려놓고 잡는다.

“아발론의 주구들아! 무너진 기사의 나라가 감히 플로렌스를 침략하느냐!”

루이즈가 결심하기 무섭게 플로렌스의 지원군들이 도착했다. 그들을 이끄는 검은 피부의 여성. ‘삭풍의 자이라’가 매섭게 소리쳤다.

“자이라님!”

수인들이 자이라를 보고 동요했으나 로드가 수인들의 앞에 선다.

“요한, 저들에게 지도를 건네줘.”

“예 로드.”

노란 머리의 사내가 주머니에서 작은 지도를 꺼낸다.

“자. 여기 지도대로만 가면 아발론이 나올겁니다. 아발론에 도착하면 이 지도를 보이고 로드의 허가로 왔다고 하세요.”

지도를 건네받은 루이즈. 이미 침입자들과 함께 있는 장면을 플로렌스에게 들킨 이상 더 이상 선택지가 없었다.

“어서 출발한다!”

루이즈는 수인들과 함께 지도에 나온 길로 달리기 시작했다.

어둠이 자욱한 하늘.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수인들이 움직인다. 그들의 움직임은 전쟁의 귀재 탕구르족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엉성하고 어색했다. 평생을 명령에 따르며 살아온 그들에게 갑작스레 주어진 ‘자유’는 그들의 감정과 행동을 옭아매기 충분했다.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른다. 그저 이 길을 따라가면 나온다는 아발론에 하루빨리 도착하기만을 바라며 그저 달리고 있었다.

쉬지 않고 달리길 반나절 정도 됐을까. 아무리 체력이 좋은 탕구르족이라지만 이 정도 강행군은 그들을 지치게 했다.

“좀 쉬지?”

선두로 달리는 루이즈가 베카의 말에 멈칫한다.

“그럴 시간 없다. 어서 플로렌스를 벗어나야...”

뒤를 돌아보니 수인들의 얼굴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잠시 휴식하자.”

루이즈의 말에 수인들은 화색하며 무기를 내려놓는다. 나름 탕구르족의 우두머리였다지만 막상 플로렌스의 명령 없인 동료들의 휴식도 챙겨주지 못한 스스로에게 실망한 루이즈. 어두운 표정으로 나무에 기댄다.

루이즈는 앞으로의 삶을 걱정한다. 아발론에 도착한다 해서 과연 아발론인들이 우릴 편견 없이 받아줄까, 전장에서 도망친 자신들을 선조들이 부끄러워하지 않을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이는 루이즈.

툭.

그때 루이즈의 머리 위로 뭔가 떨어진다. 붉은 빛을 띄는 작고 동그란 물체. 그걸 집어든 루이즈의 얼굴에 의아함이 보인다.

“우와아아아아 그건-!!!”

숲이 떠나가라 소리지르는 베카. 놀란 루이즈는 그것을 떨어뜨렸다. 베카는 떨어진 그것을 후다닥 집어든다.

“뭐야? 왜 그래?”

“이..이건..”

수인 모두가 숨죽인 채 베카를 바라본다.

“체..체리..!!!!!!!!!!!!!!!!!!!!!!!!!!”

베카는 순식간에 그것을 입에 넣어버린다. 당황한 수인들.

“야 그게 뭐냐고!”

루이즈가 베카를 잡고 흔든다. 하지만 이미 베카의 얼굴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황홀경이 펼쳐져 있었다. 수근대는 수인들 틈에서 누군가 조심스럽게 말한다.

“나도... 저걸 본 적 있어... 인간들이 자주 먹던 거야...”

“인간들이 먹어?”

“그럼 맛있는 거라는 거잖아!”

순식간에 수인들은 소란스러워진다.

“목소리 낮춰!”

루이즈는 시끄러운 수인들을 통제해보려 하지만 이미 수인들의 입에선 침이 흐르고 있다.

“나도... 나도 먹을래!”

이성을 잃은 수인들에게 루이즈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빛처럼 빠르게 나무를 타고 올라 열려있는 열매를 따먹기 시작했다. 수인들은 베카와 같은 표정을 지으며 행복해한다.

“다들 제정신이야? 좀 조용히.. 흡!”

그들을 말리려는 루이즈의 입에 베카가 체리를 쑤셔 넣는다.

“이게 무슨!!”

당황한 루이즈에게 베카가 웃음 짓는다.

“어때 보여?”

베카의 눈길을 따라간 루이즈. 그제서야 루이즈의 눈에 수인들의 표정이 보인다.

“...”

전장에 나가 싸우며 죽음만을 기다라던 수인들의 얼굴에 저런 표정도 있다는 걸 루이즈는 새삼 느낀다.

“선조들의 평원을 모독할 생각은 없어.”

베카는 씁쓸해하며 말한다.

“단지 한 번뿐인 생을 끝나기만 바라는 우리 인생이 좀 안됐을 뿐이야.”

“...”

“너무 걱정하지마. 아발론에 도착하기만 하면 저들도 잘 적응할거야.”

베카는 로드의 얼굴을 떠올린다.

“거짓말할 사람 같진 않았어.”

뒤돌아 하늘을 보는 루이즈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진다.

“...10분 뒤에 움직이자.”

털썩. 삽시간에 공기가 바뀌었다. 루이즈는 자신의 뒤통수 너머 무언가 일어났다는 걸 느꼈다. 무언가 쓰러진 소리, 그리고 발바닥을 적시기 시작한 액체. 루이즈의 온몸의 털이 빠짝 섰다.

“저깄다-!!”

“다 죽여버려!!”

뒤를 돌아본 루이즈의 시야에 숲을 둘러싼 수많은 플로렌스 병사들이 보인다. 패닉에 빠진 루이즈와 수인들. 플로렌스의 화살과 창에 수인들은 속수무책 쓰러진다.

수인의 전투 능력이라면 플로렌스 병사 열댓은 충분히 동귀어진할 수 있었지만, 일생을 플로렌스의 노예로 살아온 수인들은 감히 주인들에게 무기를 들 수 없었다.

“...내가.. 내가 여유 부리지만 않았더라면...”

루이즈의 표정이 창백해진다.

“나 때문이야.. 빨리 이동했어야 했어.”

점점 쌓이는 수인들의 시체 가운데 스스로를 자책하는 루이즈. 그의 귓가를 죽어가는 수인들의 비명 소리가 가득 채운다.

“그래... 어차피 이렇게 될 운명이었...”

덥썩

누군가 루이즈의 발목을 붙잡는다. 밑을 내려본 루이즈는 화살에 맞아 쓰러진 베카가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있는 걸 본다. 베카를 부축하는 루이즈. 화살이 급소를 찌른 듯 하다.

“루..이즈...”

“...”

“좀.. 일으켜..쿨럭!”

피를 토하는 베카. 루이즈는 그를 더 꽉 부축한다.

“네 말은 틀렸다 베카. 죽음을 기다리지 않는 우리라니.. 애초에 허무맹랑한 이야기였어.”

“킥킥...”

베카의 낮은 실소는 곧 쿨럭거림에 묻혔다.

“평원에서 기다려라. 곧 따라가마.”

루이즈는 베카를 나무 밑동에 뉘어주려 했지만 베카는 나무에 기대 버틴다.

“겨우 이렇게 죽으면... 선조들을 볼... 낯짝이 없다고...”

“어쩌려는거야?”

베카가 참혹한 현장을 손가락으로 가르킨다. 수많은 수인의 시체가 바닥에 쌓여갔고 그들이 흘린 피는 숲속을 가득 채웠다.

“넌... 저게 명예로운 전투로 보여..?”

“또 무슨 헛소리를...”

“선조들은... 그렇게 생각... 안할거야.”

그 순간 베카에게 날아온 플로렌스 병사의 창. 베카는 날렵하게 창을 낚아챈다. 슈슛-. 퍽. 베카가 낚아챈 창이 순식간에 플로렌스 병사의 몸에 꽂힌다.

“...어?”

창에 맞은 병사는 외마디 신음을 내고 쓰러졌다. 살가죽이 찢어지고 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가득하던 숲속에 고요한 적막이 찾아왔다. 그 적막을 깬 건 병력의 지휘관이었다.

“감히... 감히 노예 주제에 주인에게 이빨을 보여?!!”

지휘관은 허리춤의 칼을 뽑아 들고 명령한다.

“다들 뭘 가만있어? 당장 저 노예 새끼들 잡아 족치지 않고!!”

우오오오오오-!!

병사들이 흥분해 달려든다. 루이즈는 베카를 바라본다.

“너.. 이게 무슨...”

“해보니까... 쿨럭... 별 거 아니잖아.”

베카가 칼을 꺼내든다. 루이즈는 놀라 소리친다.

“베카! 우리의 숙명을 잊었어?!”

“숙명...”

베카는 심장에 박힌 화살을 거칠게 뽑는다.

“평생 주인에게 충성하다.. 전장에서.. 명예롭게 죽음을 맞이하는 거...”

달려오는 병사들에게 비틀거리며 다가가는 베카.

“여긴 전장도 아니고... 이건 전투도 아니야...”

“뭐?”

“이건... 일방적인 학살이지... 겨우 이딴 거에 죽는 게... 명예로운 죽음이 아니라고..!”

베카가 칼을 휘두른다. 베카에게 달려오던 병사가 급히 창을 들어 방어 자세를 취했지만, 베카의 칼은 창대와 함께 병사의 목을 벤다.

“탕구르족은... 주인에게 선택되어 목숨을 바칠 수 있다.”

베카는 고개를 돌려 루이즈를 보며 말한다.

“아발론의 군주는 우릴 받아줬다.”

캬아아아아아- 귀가 찢어질 듯한 괴성과 함께 베카가 병사들에게 달려든다. 그가 휘두른 칼질 한 번에 병사 하나의 목이 날아갔고, 병사들은 처음 대적해보는 탕구르족의 전투력에 우왕좌왕했다.

베카 혼자 병사 스무명정도를 쓰러트렸을 즘 거대한 창이 베카에게 날아온다.

콰직

창은 정확히 베카의 가슴을 꿰뚫었고, 베카는 주저앉았다,

“고작 노예 한마리한테 쩔쩔매다니.”

창의 주인은 지휘관. 그는 베카에게 꽂힌 창을 뽑아 든다.

“평원에서...보자...”

그 말을 끝으로 눈을 감은 베카의 붉은 털은 흘린 피 때문인지 불과 같이 붉게 물들어이었다.그 장면을 지켜보는 수인들의 사기가 점점 차올랐다. 플로렌스에서 노예로 태어나 자연스럽게 플로렌스인들을 주인으로 섬기며 천대받던 과거가, 동족들이 학살당하는 순간에도 주인에게 복종하는 태도가 그들에게 처음으로 수치심이란 감정을 안겼다.

크륵.. 크르륵... 수인들을 감싸고 있던 공기가 달라졌다. 그들은 어느새 무기를 들고 있었고 점점 병사들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더이상 너네들은 우리 주인이 아니야.”

“우린 아발론의 군주의 명령에 따른다.”

“명예롭게 평원에 가자!!”

캬아아아아아-!!

“멈춰!”

수인들이 병사들에게 달려들려던 순간, 루이즈가 그들을 멈춰세운다.

“루이즈! 아직도 저들을 주인으로 여기는 거야?”

“이미 전장을 떠났을 때부터 우리의 주인은 아발론의 군주였어!”

수인들의 외침에 루이즈가 나지막히 답한다.

“우린 주인의 명령에 따른다.”

루이즈는 몸에 두르고 있던 플로렌스의 갑옷을 벗어 던진다.

“분명 아발론의 군주는 우리보고 살아서 아발론에 도착하라고 했다.”

루이즈의 눈빛은 비장했다.

“저들은 나와 베카가 막는다. 너넨 아발론으로 달려가.”

“그게 무슨 헛소리야?”

“또 전장에서 도망치란 말이냐?”

의아해하는 수인들을 지나쳐 병사들과 싸우고 있는 베카에게 다가가는 루이즈.

“우두머리로서 이정돈 해야 선조들을 뵐 낯이 생길 것 같다.”

“우리의 긍지를 또 어길 순..!”

“탕구르족이 살아서 아발론에 도착하는 것이 긍지를 지키는 길이다. 당장 아발론으로 달려
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루이즈는 베카에게 달려간다. 나머지 수인들은 잠시 고민하더니 모두 숲길을 달려갔다.

‘평원에서 만나자.’

“저 짐승들이 꼬리를 내빼는구나! 당장 잡아와!”

수인들을 쫒아가는 병사들. 병사들은 활을 겨눴고, 활 시위를 놓으려 할 때 루이즈가 달려와 병사의 머리를 땅에 쳐박아버린다.

머리를 잡고 견고하게 서있는 루이즈의 모습은 마치 작은 성벽과도 같았다.

“지금부터 내 뒤론 어떤 것도 못 지나간다.”

붉은 피로 가득한 숲속에는 귀를 울리는 쇠붙이 소리와 비명 소리만이 난무했다.

털썩.

막대한 피를 흘리며 무릎을 꿇은 루이즈는 힘겹게 하늘을 올려본다. 피와 시체들이 뒤엉킨 대지에 대비되게 하늘의 별빛은 찬란하고 아름다웠다.

“독한 새끼.”

플로렌스 병력의 지휘관이 루이즈의 목에 칼을 갖다 댄다. 지휘관은 홀로 수많은 병력을 막아낸 루이즈에게 분노와 공포, 심지어 경외심까지 느꼈다. 그때 멀리서 달려온 정찰병.

“이미 국경을 넘은 것 같습니다.”

“망할!!”

생존한 수인들이 플로렌스의 국경을 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루이즈는 작은 미소를 띈다. 지휘관은 루이즈를 노려보며 말한다.

“약속 하나 하지. 도망친 노예 새끼들 전부 언젠가 잡아 죽여주마.”

목의 핏대를 잔뜩 세우고 겁박하는 지휘관을 보며 루이즈는 로드를 떠올린다.

“내가 도와주겠다. 나는 그런 세상을 위해 싸우고 있고, 그대들에게도 알려주고 싶다.”

온몸 가득 깊은 상처로 가득한 루이즈는 표정만큼은 평온했다. 지휘관은 씩씩대며 칼을 높이 쳐들었고, 루이즈는 비로소 눈을 감는다.

뎅겅-

눈을 감은 루이즈의 시야에 무언가 따스한 빛이 보인다. 어딘가 익숙하지만 낯선, 그토록 기리던 평원이.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