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날들이 뒤섞여 비명을 쏟아냈다. 그 중심에 서 있던 여인이 모자를 푹 눌러쓰고 한 손에 바이올린을 쥐었다. 누가 그녀를 부르는가. 그녀를 사랑하고 따랐던 자들, 그녀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방패가 된 자들, 그리고 살기위해 왕녀에게 모든 희망을 떠안겼던 자들이었다.

상냥한 왕녀는 그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무너져가는 나라 ‘알드룬’의 강인한 왕녀로서 버텼다. 어느 날은 깃발이 되고, 검이 되어, 민중의 목소리가 됐다. 함께 피흘려 싸우는 사람들을 보며 왕녀는 절대로 무너질 수 없었다.

왕족이 멸족되고 저 홀로 남았을 때 왕녀는 침묵했다. 애통과 탄식의 시간조차 사치로 여겨져 주먹을 꽉 쥐었다. 전투에 사용했던 바이올린이 마모되어 더는 사용할 수 없었을 때, 검은 정장과 망토를 차려입은 낯선 이가 찾아왔다.

‘저는 아발론의 군주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로드’라 불렀다. 그를 따르는 기사들은 수천, 수만의 적과 대항할만큼 강했다. 기울어가던 판도가 바뀌었다. 더 많은 영웅들이 합류했다. 그들은 갈루스 제국과 대항해 싸우다, 최종의 적을 찾아 싸웠다.

그때 왕녀는 로드가 사용하는 ‘유니버스’란 것을 처음 알게 됐다. 시공간을 초월하며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만드는, 신비한 시스템이었다. 마지막 전투라 일컬어지는 날, 모든 시간선이 통합되었다. 다른 시간선에 살고 있던 수많은 영웅들이 한 곳에 모이는 진풍경을 지켜봤다. 왕녀는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한 영웅들을 발견했다.

‘전부 나구나…’

왕녀는 자기도 모르게 그런 말을 남겼다. 그날을 끝으로 긴 전쟁이 끝났다. 알드룬은 해방되고 온 나라가 회복에 전념했다. 더 이상 알드룬에는 비명 소리가 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흘려버린 피와 묻어버린 뼈에선 끊임없이 악취가 흘렀다.

나라를 배신했던 자들을 걸러내고, 마땅한 처벌을 내렸다. 피해 현장을 복구하고, 상처 입은 국민들을 앞서 돌봤다.

‘더는 다툼이 없는 세상이 오기를…’

새로운 곳에서 다툼과 갈등이 생겨나고, 바네사는 그때마다 다시 왕녀로서 살아가야 했다. 그러니 지금까지도 자신의 귀에선 비명 소리가 멎지 않는 것일까.

‘왕녀님!’

바네사는 귀를 틀어막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불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베개 맡에서 잠들었던 물의 수호령, 리바이어선이 몸을 웅크렸다. 커다란 용과 요정을 닮은 그것은 평소엔 새끼처럼 작은 모습으로 지냈다. 모든 수호령은 필요할 때만 모습을 드러냈다. 바네사는 헝클어진 짧은 머리칼을 쓸어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옷장 옆에 있던 전신 거울에 한 인영이 비쳤다. 달빛을 삼킨 것처럼 하얀 머리칼과 옅은 자주색과 푸른색이 맴도는 눈동자, 부드러운 실크 잠옷이 눈에 띄었다. 위기라곤 없는 나른한 모습 그 자체였다.

“…다행이다, 꿈이었구나.”

이젠 적응이 될 법도 하건만, 여전히 알드룬이 몰락하던 시절의 꿈을 꿨다. 몇 년 동안 알드룬을 정비하다가 로드의 권유로 아발론에 잠시 머물게 됐다. 인생에 휴가도 필요하다고 했던가, 그 엉뚱한 말에 이끌려 짧은 여행을 시작했다. 바네사는 목을 축이며 의자에 앉았다. 그때 한 병사가 급히 방문을 두드렸다.

“바네사 경!”

로드의 긴급 소집이었다. 겉옷을 걸치고 바네사는 곧장 왕성 홀로 향했다. 늦은 새벽이었기에 모인 기사들도 가벼운 잠옷 차림에 가까웠다.

어라, 인원이 평소보다 많은 것 같은데? 바네사는 익숙한 뒤통수를 보고 반갑게 말을 걸었다.

“올가 경, 아발론에 오셨었군요.”

반갑게 말을 걸자 검은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올가가 바다처럼 푸른 눈을 크게 떴다. 뛰어난 저격수이자 리브리안의 저항군이었던 그녀는, 그 자체로 존경과 위로가 되는 존재였다. 로드를 통해 만나게 되면서 이제는 좋은 친우가 됐다.

“바네사 경…?”

“염색을 하셨나요? 저번이랑 달라지셨는데….”

잠깐, 머리는 그렇다쳐도 눈동자를 염색할 일은 없잖아. 두 사람은 서로 할 말을 잃고 쳐다봤다.

“바네사 경이야말로 달라지셨군요. 한결 표정도 밝아지셨고….”

마지막으로 마주친 게 한 달 전인데, 미묘하게 대화가 엇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럼에도 반가운 마음은 여전해서 정답게 손을 맞잡고 계속 대화를 이어갔다.

“한 달 동안 많은 일이 있었군요.”

“…저희가 마지막으로 만난 건 반년 전입니다, 바네사 경.”

그 순간 무리의 중심에서 ‘로드!’ 하고 큰 소리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바네사는 올가와 함께 앞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자신이 기억하는 모습과 사뭇 달라진 ‘수많은 영웅들’을 보게 됐다. 그중 언제나 큰 모자로 귀를 가리고 다니는, 훌륭한 정령사 샬롯이 보였다. 치유 능력을 함께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던가. 샬롯이 한 곳에 3명이나 있는 것을 보고, 바네사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때 깊은 한숨을 내쉬며 로드가 말했다.

“다들 놀라지 말고 들어줘요, 유니버스에 작은 오류가 생겼습니다.”

불과 1시간 전 유니버스를 업데이트 할 때였다. 작은 오류가 생겨 마지막 전투 때처럼 시간 선이 통합되어 버렸다. 그 결과 이 왕성에 모든 영웅들이 모여 버린 것이다. 다행히 문제의 원인을 금방 찾아, 3일이면 복구할 수 있다고 한다. 짧은 회의 끝에 혼란이 퍼지는 것을 방지해, 모두가 아발론 왕성에 머무르는 것으로 결정했다.

방을 배정받고 기사들이 하나둘 돌아갔다. 이 안에 분명 다른 ‘나’도 있겠지? 바네사는 들뜬 기분으로 복도를 걸었다. 코너를 돌자 누군가 벽에 비스듬하게 서 있었다.

“바네사… 경?”

상대의 부드러운 금발이 바람결에 흔들렸다. 그는 미처 할 말을 잇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놀란 걸까? 그마저도 미세한 균열처럼 큰 표정의 변화는 없었다.

“…조슈아 경?”

분위기가 지나치게 가라앉아 있어 한 번에 못 알아봤다. 자신이 아는 조슈아와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제국군의 특임대장이었던 그는 최악의 악연이었다. 로드와 함께 그와 싸우게 되었을 때, 그에겐 제국의 세뇌가 깊게 뿌리박혀있었다. 그것이 풀렸을 때 마주한, 텅 비어버린 눈동자를 여태 잊을 수 없다. 내게 남아있는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지금은 아발론에 지내고 있다고 하던가?

그가 조심스럽게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입구를 열자 옅은 찻잎의 향긋한 향이 주변을 맴돌았다. 찻잎의 종류도 다양했고, 하나같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었다.

“왕녀는… 받아주는군요.”

그의 말이 씁쓸한 차 맛처럼 텁텁하게 느껴졌다. 그는 어떤 시간 선에서 살았던 걸까, 그리고 어떤 바네사를 만났을까.

“원래 주려던 상대를 찾는 것이 나을 텐데요.”

“…당신도 왕녀이지 않습니까.”

확신에 찬 그 말에 바네사는 희미하게 웃었다. 살았던 곳은 다르지만, 그럼에도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을까. 바네사는 차를 받기로 결정했다. 그렇다면 다른 바네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잠시 떠올린 것만으로도 흥미롭게 느껴졌다.

“오류로 인해 여러 만남이 생겼네요.”

바네사는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자신의 방문을 열었다. 순간 헛숨을 들이켰다. 창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그 앞에 있던 하얀 테이블 위에 찻잔이 굴러다녔다. 몇 개는 산산조각이 나 바닥을 뒹굴었다. 그 옆으로 작은 쪽지가 눈에 띄었다.

[그들을 용서하나요, 바네사?]

휘갈겨 쓴 글씨는 누구의 것인지 당장 알 턱이 없었다. 찻잔을 제외한 것들은 전부 방을 나서기 전처럼 깨끗했다. 고의적으로 찻잔만을 깨뜨렸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바네사는 통로로 사용됐을 창가를 날카롭게 바라봤다.

* * *

다음 날 아침, 바네사는 곧장 로드를 찾아갔다. 간밤에 있었던 일을 전하려는데, 이미 로드의 주변은 잡음이 꽉 찬 것처럼 혼란스러운 분위기였다.

“무슨 일이죠?”

언제나 밝은 웃음을 짓던 대검의 기사 프람이 길고 검은 머리를 긁적이며 작은 목소리로 얘기했다.

“끙… 기사들 방마다 있는 큰 액자 있잖아, 아발론 기사 문양이 그려진 그거! 그걸 누가 간밤에 박살냈대.”

“네? 그 많은 거를요?”

액자는 기사 임명식을 치룬 아발론의 기사들이 받는 일종의 상징물이었다. 프람이 골똘히 망가진 개수를 세보고 있을 때, 두 명의 요한이 말을 거들었다. 그는 언제나 로드를 보좌하는 광명의 기사였다.

“전부는 아니고… 전 갈루스 출신 기사들 방에 있던 것만 망가졌습니다.”

대략 시간을 추정해보니, 로드가 긴급 소집했던 시간 전후로 사건이 발생했던 것 같다. 그러니 방에 도착한 영웅들이 이를 발견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짧은 시간에, 정확한 목표를 정해 일을 저질렀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다른 요한이 말을 이었다.

“피해를 입은 기사들은 모두 ‘의문의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우는 소리 같기도 하고, 노래
나 연주 소리 같기도 하고…”

혹시 유령은 아니냐며 프람과 샬롯이 떠들썩하게 말했다. 바네사는 ‘연주 소리’라는 점에 주목했다. 그리고 다른 기사들이 조사를 떠난 후, 로드를 따로 찾아갔다.

“간밤에 제게도 비슷한 일이 있었어요. 누군가 고의적으로 찻잔을 깨드렸죠.”

아마 자신이 조슈아를 마주쳤을 시점일 것이다. 우연히 찻잎을 선물 받았는데, 꼭 이를 방해하는 것처럼 찻잔을 부순 점이 의심스러웠다. 누구를 향해 불만을 표시한 걸까. 방의 주인인 자신일까, 아니면 전 갈루스 출신의 조슈아일까. 바네사는 결연하게 말했다.

“제가 범인을 찾아볼게요.”

“명확한 악의가 담긴 일입니다, 위험해요.”

“그렇기에 제가 찾아야 돼요. 범인이 제게 쪽지를 남겼잖아요?”

그들을 용서하나요, 바네사.

내가 그들을 용서 하냐고? 정말 대답이 듣고 싶었던 거라면 이런 방법을 쓰면 안됐다. 바네사는 알드룬에서 받았던 수많은 협박과 악의적인 서신들을 떠올렸다. 전쟁은 끝났다. 더는 받고만 있을 생각이 없었다.

로드와 긴 대화가 이어졌다. 바네사는 로드의 만류에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고 전 사실, 의심되는 인물이 있어요.”

저와 무척 가깝고, 저에게 그런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사람. 바네사는 다른 시간선의 바네사들을 찾기로 결정했다. 결연한 눈빛을 마주한 로드는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시간선을 넘어온 바네사가 총 4명이란 정보와 함께, 그들의 외향적 특징을 설명했다.

“그런데, 네 명중에 한 명은 유독 분위기가 다르더군요.”

로드가 한 말을 곱씹으며 바네사는 왕궁 도서관으로 향했다.

* * *

층고가 높은 건물 내부에 책이 빼곡하게 쌓여 있었다. 책을 쉽게 꺼낼 수 있도록 설치된 작은 계단에 누군가 걸터앉아 두꺼운 책을 읽고 있었다.

부드러운 갈색 머리칼과 연두색 눈동자가 뚜렷한 인상을 만들었고, 주변에 가느다란 햇빛이 스친 것처럼 고요하게 빛나 보였다. 빛의 수호령 오베론이 그녀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기 때문일까. 그녀는 평상복에 가까운 가벼운 셔츠와 남색의 긴 치마를 입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바네사.”

그러자 갈색 머리의 바네사가 책에 있던 시선을 돌렸다.

“…어머. 반가워요, 바네사.”

그녀는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자연스럽게 옆 자리를 권했다. 첫 번째로 만난 바네사는 그토록 여유로웠고 책을 넘기는 긴 손가락이 우아해보였다.

“무슨 책을 보고 계셨나요?”

“아, 역사서예요. 이전 정책들을 살펴보고 있었어요.”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근래 있었던 나랏일에 대해 의논했다.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지만, 두 나라의 상황은 똑같지 않았다. 바네사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해방된 시기가 다르네요.”

“그러게요, 국민들의 시각에도 차이가 있고요.”

바네사의 이야기에 집중하던 그녀가 책 하나를 꺼내들며 말했다.

“이번에 결과가 괜찮았던 정책이 있었어요. 이 책을 참고해보세요.”

생각지도 못했던 의견과 조언을 얻고, 바네사는 무겁게 지고 있던 짐이 하나 덜어진 기분을 느꼈다. 여행 중에는 애써 모른 척 지내려 했지만, 자국에 대한 고민은 항상 끝이 없었다.

똑같은 얼굴을 한 사람이 어려운 고민 속에서 답을 찾아가는 그 모습이, 꼭 빛을 보는 것처럼 밝게 느껴졌다. 바네사는 부드럽게 미소로 대답하고, 자신이 왔던 목적을 떠올려 말했다.

“…전 갈루스 제국은 어떻게 되었나요?”

그녀는 빠르게 정리되어 더 이상 알드룬과 충돌하는 일이 없다고 말했다. 후련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고, 바네사는 그녀가 범인이 아님을 느꼈다.

“반가웠어요, 바네사.”

그녀가 생긋 웃음 지었다.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그렇게 헤어졌다. 아직 만나야 할 사람들이 많았다.

바네사는 도서관을 나와 가까운 기사 훈련장으로 향했다. 조금씩 다른 외형을 가진 여러 명의 슈나이더가 기합과 함께 훈련을 하고 있었다. 그는 견인족 출신의 용맹한 기사로, 작은 체구로 위협적인 무기 데인투스를 사용했다. 그 모습이 용맹스럽고 웃는 모습이 항상 귀엽게 느껴졌다. 훈련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지나가려는데, 그들의 눈에 띄어 힘찬 인사를 받을 수 있었다.

‘꼬리… 만져보고 싶다고 하면 실례겠지?’

그리고 그들을 통해 또 다른 왕녀의 위치를 전해 들었다. 바네사는 곧장 제 2 훈련장으로 향했다.

그곳엔 불그스름한 머리칼에 그보다 색이 진한 눈동자를 가진 바네사가 있었다. 그녀는 두터운 밤색 외투를 입고 있었고, 알드룬의 문양이 들어간 붉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

그녀가 바이올린에 긴 손가락을 올리자 흔들림 없이 단단하고 감미로운 선율이 연주됐다. 불의 수호령, 이프리트가 선율에 맞춰 부드럽게 춤을 추었다. 곧이어 그녀의 몸에 막이 씌워진 것처럼 보호막이 형성되는 모습을 보고 바네사는 감탄했다.

인기척을 느낀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함께하시겠어요?”

그녀는 전투에서 사용하는 연주법을 가르쳐주겠다고 했다.

“이 활에 마음을 담는 것이 가장 중요하죠.”

“맞아요. 제 바이올린은 현이 푸른색인데, 붉은 현이 눈에 띄어요.”

그러자 그녀는 짧게 눈웃음을 지었다. 다물린 입술과 붉은 눈동자가 차분한 불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갈색머리의 바네사보다 과묵한 편이었다. 숨이 막힐 정도의 무게가 아닌, 위엄을 가진 왕녀란 이미지가 잘 어울렸다. 그녀는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손에 남은 굳은살이 많은 걸 얘기하고 있었다. 바네사는 배운 기술을 연주하며 말했다.

“이 곡을 연주할 때면, 전장은 연주회가 되겠군요.”

“좋은 표현이네요. 당신은 어떤 기술을 가지고 있죠?”

동료들이 힘을 잃고 쓰러졌을 때 다시 일으킬 수 있는 힘, 꺼져가는 생명에 온기를 주는 힘. 부드럽게 회전하며 바네사가 자신의 연주를 시작하자, 그녀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훌륭해요, 당신의 시간 선에서 큰 힘이 되었겠군요.”

자신에게 칭찬받는 것은 묘한 기분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연주법을 세세하게 알려준 후 짧은 휴식을 가졌다. 흐르는 땀을 닦으며 바네사가 말했다.

“우리가 이 연주법들을 조금 더 일찍 익혔다면… 무언가 바뀌었을까요?”

지키고 싶었으나, 지키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응어리가 여전히 남아있었다. 그녀가 평화를 얻은 지금도 훈련장에 빠짐없이 들리는 것처럼, 자신이 여전히 악몽에 시달리는 것처럼.

“우리는 처지가 비슷하군요.”

그러자 붉은 머리칼을 부드럽게 넘기며 그녀가 말했다.

“평화를 얻었다는 점이 닮았어요.”

그 말에 바네사는 크게 눈을 떴다. 떠나버린 것이 있듯 새롭게 얻은 것도 있다. 그녀는 어렵게 얻은 평화를 잊지 말라 말했다.

“지금의 휴식을 즐기세요, 바네사.”

그것이 바네사 자신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조언이었다.

* * *

하늘에선 벌써 석양이 지고 있었다.

바네사는 훈련장을 나와 흰 장미가 만발한 정원으로 향했다. 디저트를 좋아하는 영웅들이 모여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과일이 얹어진 달콤한 케이크와 고소한 쿠키, 향긋한 홍차 냄새가 정원에 가득했다. 바네사는 영웅들과 조금 떨어진 테이블에 홀로 앉아 있는 여인을 발견했다.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지금의 분위기와 여유를 만끽하는 모습이었다. 바네사가 가깝게 다가가자 밝은 금발을 지닌 바네사가 뒤를 돌아봤다. 대지의 수호령, 베히모스가 그녀와 함께 부드럽게 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총명해 보이는 푸른 눈동자를 천천히 깜빡였다.

옷차림은 만났던 이들 중 가장 눈에 띄었다. 깃이 달린 뾰족한 모자에는 작은 풀이 장식되어 있었고, 진녹색과 연한 노랑으로 포인트를 준 예복은 전장의 지휘관을 연상시켰다.

“아, 당신이군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여유롭게 상황을 주도하는 모습이 자연스러워보였다. 바네사가 마실 몫의 차를 따라내며 그녀가 말했다.

“당신의 시간 선에선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죠?”

바네사는 향긋한 차로 입을 적신 후 천천히 이야길 시작했다. 아직 정리중인 알드룬의 상황을 얘기했고, 그럴 때마다 그녀는 크게 공감했다. 가장 감정에 솔직하고 거침없어 보였다.

“그런 일까지 벌어졌을 줄은 몰랐어요… 정말 쉬운 일이 없군요.”

“네, 앞으로 나라를 이끌 인재들을 찾는 것도 정말 어렵네요.”

“사람 보는 눈은 큰 오라버니가 참 좋은데.”

“큰 오라버니요?”

두 사람은 동시에 말을 멈췄다. 가족 이야기가 나오자 바네사는 어색한 웃음을 흘렸고, 분위기를 눈치 챈 그녀가 말했다.

“혹시 가족들이….”

“전부 돌아가셨어요.”

바네사는 쓰게 웃으며 답했다. 그녀의 시간 선에선 가족들이 무사하다는 놀라운 얘기를 전해 들었다. 자신은 갈 수도, 볼 수도 없는 곳에 살아 있다니. 심지어 둘째 오라버니는 왕족의 의무를 저버리고 재판중이었다. 가장 애정이 많았던 큰 오라버니는 무사하다는 말에, 바네사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심정으로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버니, 그것에선 평안하시기를…’

그것만이 지금의 자신이 할 수 있는 말처럼 느껴졌다. 바네사를 유심히 바라보던 그녀가 겉옷에서 무언가 꺼내들었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부터 다른 나를 만나고 싶었어요. 그리고 이게 필요한 ‘내’가 있었을까 싶었죠.”

곱게 접힌 그것은 짧은 서신이었다. 바네사는 건네받아 조심히 펼쳤다. 바네사에게. 너무도 익숙한 단정한 글씨체, 첫줄을 읽자마자 눈물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애정이 묻어나는 표현이 가득 담긴 그 편지는, 동생을 향한 오빠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그의 눈에 동생은 아직도 어린 아이인지, 사소한 걱정과 함께 안부를 묻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특별한 날에 주고받는 편지가 아니라, 일상 속에서 가능한 말이 가득했다. 바네사는 다시는 듣지 못한 말들이었다. 잘 지내고 있다는 한 마디를 듣고 싶어 얼마나 마음을 태웠던가. 바네사는 편지를 꾹 쥐고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하지만 한 번 터져 나오기 시작한 마음은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바네사는 자신의 모자를 푹 눌러썼다.

그녀는 천천히 차를 마시며 바네사를 기다렸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흐느낌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바네사는 여러 번 내용을 읽고 다시 곱게 접었다.

“고마워요.”

“나야말로 선물할 기회를 줘서 고마워요, 바네사.”

세 번째 왕녀와의 만남을 끝으로 날이 저물었다. 잊을 수 없는 날이 이어졌다. 그 뒤로도 바네사는 왕성 곳곳을 다니며 마지막 왕녀를 찾아다녔다. 왕녀는 배정된 방에도 없었고, 그녀를 봤다는 기사도 없었다. 대체 그녀는 어디 있는 걸까.

* * *

두 번째 날 밤이 되었다. 그때까지 기사들의 방을 엉망으로 만든 범인도, 바네사에게 의문의 쪽지를 남긴 범인도 찾지 못했다.

내일 아침이면 유니버스의 오류가 고쳐져 다들 제자리로 돌아갈 터였다. 로드는 무거워진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작은 이브닝 파티를 열었다. 아발론의 대표 재단사 아우레아는 들뜬 얼굴로 바네사를 붙들었다.

“바네사 경에서 딱 맞는 드레스가 있어요!”

퓨어 화이트 브라이드. 목과 허리를 감싸 포인트가 되는 리본을 고정하고, 어깨를 드러낸 하얀 드레스였다. 무릎까지 오는 적당한 길이감과 풍성한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다. 바네사는 깔끔하게 머리를 손질하고 하얀 구두와 귀걸이로 마무리 지었다.

‘연주회를 한다면 딱 이런 옷을 입고 싶었지.’

흡족한 기분으로 기사들과 어울려 함께 시간을 보냈다. 편안히 이야길 나누고 먹음직스러운 만찬을 즐겼다. 그때 로드가 바네사에게 연주를 한 곡 요청했고, 바네사는 푸른 현이 달린 바이올린을 들었다.

부드러운 선율이 흐르는 그 순간만큼은 아무런 걱정도 들지 않았다.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터질 때까지 바네사는 벅차오른 마음으로 맑게 웃었다. 잠시나마 비명소리가 멎는 것처럼 느껴졌다. 바네사는 다양한 음악 소리와 기사들의 웃음소리를 두 귀에 담았다. 그제야 지금이 평화의 시대임을 되새길 수 있었다.

* * *

밤이 무르익었다. 바네사는 시원한 바람을 찾아 홀을 빠져나왔다. 잠시 산책을 하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때 세 번째 왕녀를 만났던 정원의 길목이 눈에 띄었다.

바네사는 자신의 손목을 쓰다듬었다. 아우레아가 장식해준 팔찌에 고정된 이름 모를 꽃이, 정원 깊숙한 곳에서 자란다고 했다.

아직 한 번도 그 안까진 간적이 없었다. 길을 잃어버리기 쉽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네사는 고민 끝에 정원으로 들어섰다. 혹시 저 안에서 기다리던 답이 있진 않을까. 대답처럼 가느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바이올린 소리, 바네사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소리를 따라 빠르게 걸어갔다. 점점 거리가 좁혀 질수록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아름답지만 날카롭고, 베일 듯 날이 선 음률.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녀다. 찾아 헤맸던 마지막 왕녀가 이곳에 있어.

어지러울 정도로 강한 꽃의 향이 풍겨왔다. 바네사의 손목에 매달린 꽃과 똑 닮은 하얀 꽃이 만발한 곳, 유리처럼 투명한 테이블과 의자 두 개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 앞에 검은 망토를 뒤집어 쓴 누군가가, 바네사를 향해 돌아섰다.

“바네사…가 맞습니까?”

상대는 투박한 흰 가면을 쓰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어둠의 수호령, 닉스만이 유유히 그 곁을 맴돌고 있었다. 경계선을 그어둔 것처럼 바네사가 선 곳과, 그들이 있는 곳은 구분된 것처럼 느껴졌다. 가라앉은 분위기에 바네사는 숨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때 상대가 주저 없이 답했다.

“그게 제 이름이죠.”

바네사와 닮았지만 훨씬 더 낮게 울리는 목소리였다. 그녀의 발밑으로 망가진 바이올린이 가득했다. 하나같이 현이 끊어져 있거나, 목이 부러져 있고, 옆판이 박살난 것도 있었다. 간신히 형태를 유지하는 바이올린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내 질문의 답은 생각해 봤나요?”

그 순간 깨진 찻잔의 이미지와 작은 쪽지가 떠올랐다. 마지막 왕녀는 쪽지를 알고 있다. 바네사는 긴장된 마음을 감추며 차분히 말했다.

“역시 당신이었군요. 기사 분들의 방을 엉망으로 만든 것도 당신인가요?”

그러자 흐릿한 웃음소리가 흘렀다. 비웃는 것은 아니었으나, 바네사는 어쩐지 그 웃음이 위태롭게 들렸다. 그녀는 쉽게 답을 줄 생각이 없었다. 바네사는 부서진 바이올린 하나를 들었다.

“다른 분들을 다치게 할 순 없어요. 만약 당신이 한 일이라면, 나는 책임지고 막을 것입니다.”

그러자 왕녀가 말했다.

“왜 그렇게 남을 돕고 구하려하죠?”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단 한 명도 구하지 못한다면?”

단 한 명. 그 명확한 표현에 침묵이 일었다. 두 사람 사이의 바람은 어느덧 냉기를 품고 맴돌고 있었다. 바네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구할 수 있어요.”

“아니, 지나온 과거와 미래, 우리는 그 중에 무엇 하나 알 수 없습니다.”

“제가 당신의 과거를 모르는 건 맞아요, 그리고 나를 모르는 건 당신도 마찬가지죠.”

바네사는 부러진 활을 잡았다. 도저히 연주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조합에도 바네사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게 지금껏 자신이 살아왔던 방식이었다.

“저는 마지막을 볼 때까지 포기하지 않아요.”

“…”

“당신은 어떤 삶을 살아왔죠?”

왕녀는 답하지 않았다. 엉망이었다, 최악이었다, 방법이 없었다, 죽음이 낭자했다, 배신이 난무했다, 떠오르는 표현은 많았으나 한 마디로 정리되지 않았다.

믿었던 동료와 가족들에게 배신당하고, 용서하기도 전에 전부 죽어버렸다면? 도움을 주겠다는 나라들이 차례로 멸망한 일은? 생각할수록 자조 섞인 웃음만 흘러나왔다. 그나마 보이던 희망마저 짓밟혀 아무도,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면? 무너진 알드룬의 흔적을 밟고 겨우 숨을 쉬는 것이 바네사 당신이라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왕녀는 바네사에게 구태여 설명하며 이해와 동정을 얻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과 닮았지만 그럼에도 다른 웃음과 마음을 가진 이에게 작은 흥미가 생겼을 뿐. 자신의 시간 선에선 절대로 용서할 수도, 어울릴 수도 없는 자들과 함께 하는 삶이 궁금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모습이 거슬렸던 것 또한, 분명 사실이었다. 왕녀가 말했다.

“…내기를, 하나 할까요? 그럼 당신이 원하는 답을 드리죠.”

왕녀는 발밑에 걸릴 만큼 가까운 곳에 있던 바이올린을 들었다. 마찬가지로 희망이 없어 보이는 것이었다.

“부서진 바이올린 중 단 한 개라도 연주가 가능하다면, 당신의 말이 옳다고 인정하겠습니다.”

바네사는 분명 마지막을 볼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미 부서져버린 것들에도 당신은 희망을 걸 수 있나. 유치하고 불공평한 내기에 당신은 어떻게 반응할까.

“좋아요, 하나씩 번갈아가며 연주해요.”

바네사가 고요히 눈을 빛내며 답했다. 먼저 자신의 바이올린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음 하나 제대로 내지 못하고 몸체가 부러졌다. 그럼에도 눈동자에선 조금의 의지도 꺾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왕녀가 바이올린을 켰다. 희미한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귀가 아플 정도로 날카로운 소음이 울렸다.

바네사는 두 귀를 막았다가 새로운 바이올린을 주워들었다. 마찬가지였다. 이미 악기의 역할을 잃어버려 부서진 나무 조각에 불과했다.

하지만 누구도 내기를 멈추지 않았다. 한편에 검증이 끝난 바이올린이 쌓였다. 남은 수가 많지 않았다. 바네사는 간절한 마음으로 몇 번째인지 모를 바이올린을 들었다. 손에 잡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끝까지 연주를 이어나갈 순 없었다.

바네사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이올린을 내려놨다. 왕녀는 곧이어 새로운 바이올린을 잡았고, 결과는 똑같았다. 미련 없이 한편으로 던지는 모습은, 바이올린을 소모품 그 이상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줬다.

바네사가 지금껏 만났던 모든 왕녀들은 바이올린을 아꼈다. 또 전장에 가져가 전장을 지휘하고, 동료들을 지키며 싸우는 용도로 사용했다.

그렇다면 그 의미와 이유까지 잃어버린 마지막 왕녀에겐 무엇이 남아 있을까. 그녀에게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바네사는 하나 밖에 남지 않은 바이올린을 들어올렸다. 어깨에 올려 왼손으로 고정한 채, 오른손으로 활을 쥐었다. 그때 바이올린에서 바네사를 닮은 부드럽고 선명한 선율이 흘러나왔다. 바네사는 멈추지 않고 연주를 이어나갔다.

지금의 연주에 이름을 붙인 적이 있었다. 구원의 음률, 쓰러진 동료들을 일으키고 전장의 판도를 뒤바꿨던 강렬한 선율.

바네사의 손에서부터 시작된 연주가 어두운 정원을 밝혔다. 살랑거리는 바람이 어우러져 머리칼과 드레스 자락을 흔들었다. 왕녀의 검은 망토가 뒤집힌 것은 그때였다.

왕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귀에 걸쳐진 가면이 흔들려도 붙잡지 않았다. 바네사는 왕녀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후반부를 연주했다. 음이 높아지는 구간에서 강한 바람이 훅- 불면서 가면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때 바네사는 왕녀의 온전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자신과 똑같은 얼굴은 상처투성이였다. 왕녀는 가릴 마음도 없어 보였다. 감정을 담지 않는 것처럼 흐릿한 표정에, 눈동자에는 탁한 빛이 맴돌았다.

이곳에 있지만, 이곳에 없는 것처럼. 아득히 먼 곳에 머물러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저 삶에 담겨진 무게를 가늠할 수 없었다. 자신이기에, 바네사였기에, 그녀가 어떤 길을 걸었는지 함부로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귀에도 끝나지 않는 비명이 흐르진 않을까.

그럼에도 내기에 이긴 자신은 말해야만 했다.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그 말을.

“계속 나아가세요.”

왕녀는 희미하게 어떤 표정을 그려냈다. 바네사는 그 감정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몰랐다. 그저 거울처럼 마주본 자신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그녀에게 작은 동요가 일어났다는 작은 희망만을 걸 수밖에 없었다. 왕녀는 홀연히 사라졌다. 바네사는 말없이 빈 정원을 바라보다, 천천히 바이올린을 내려놓았다.

* * *

눈을 감았다 떴을 때는 이미 마지막 날 아침이었다. 로드의 소집과 함께 기사들은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아직 대화도 못해본 영웅들이 많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로드, 준비 끝났어.”

유니버스를 관리하는 소녀 뮤가 신비로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로드는 고개를 끄덕였고, 큰 빛이 왕성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시간선으로 돌아가야 하는 영웅들의 몸이 조금씩 흐릿해졌다. 바네사는 자신을 지켜보는 모든 왕녀들을 향해 인사했다.

그들의 미소를 끝으로, 유니버스가 제자리를 찾았다. 기사들이 떠나간 자리는 유독 텅 비어 보였다. 씁쓸하게 미소 짓는 바네사의 옆으로, 아발론의 기사이자 레인저인 미하일이 다가왔다. 그는 하얀 머리칼의 엘프로, 사촌 동생인 연금술사 린과 투닥거리는 모습을 몇 번 봤었다. 사이좋은 가족의 모습은 언제나 눈길이 갔다.

“그론달의 소행이라는군요.”

강아지를 꼭 닮은 모습의 그론달이 배고픔에 왕성을 돌아다니다가, 기사들의 방과 부엌을 엉망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미하일이 전해주는 말에 바네사는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꼭 긴 꿈을 꾼 것처럼 모든 일이 몽롱하게 느껴졌다.

정말 그론달이 한 짓일까? 의문이 풀린 것은 다행이지만, 마음 한 구석에 찝찝한 느낌이 일었다. 음식만 노렸던 거라면 이해가 되지만, 특정 인물들을 찾아갔던 것이 신경 쓰였다. 무엇보다 자신의 방에 쪽지를 두고, 찻잔을 부순 건 마지막 왕녀가 맞았으니 말이다. 바네사는 왕성이 정리되는 것을 보다가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내가 창문을 열어놓고 갔었나?’

커튼이 새차게 휘날리며 창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리고 창틀에 익숙한 글씨체의 쪽지 하나가 눈에 띄었다.

[ 잃어버린 음률. ]

짧은 연주 악보였다. 마지막 왕녀가 남긴 이것은, 그녀가 남긴 마지막 답변이었으리라.

바네사는 활을 쥐고 천천히 연주를 시작했다. 평소 연주하던 곡과 다른 진행이 나쁘지 않았다. 아름답고 날카로운 음률과 함께, 순식간에 눈앞의 물건들이 산산조각났다.

“앗!”

마치 기사가 검을 휘두르는 것처럼, 정확히 표적을 잡고 공격하는 것에 특화된 기술이었다. 그 순간 기사들의 부서진 액자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바네사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바네사!”

왕녀는 답을 주겠다는, 마지막 약속을 지키고 떠났다.

바네사는 이 사실을 알렸고, 로드는 둘만의 비밀로 삼기로 결정했다. 바네사는 기진맥진해져서 방으로 돌아왔다. 습관적으로 방을 살폈지만 다행히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바네사는 테이블 위에 물건을 정리했다. 첫 번째 바네사에게 추천받은 책, 두 번째 바네사에게 받은 기술을 정리한 노트, 세 번째 바네사에게 받은 오라버니의 편지. 마지막은 잃어버린 음률이라 적힌 악보였다.

그들은 원래 자리로 돌아갔지만 바네사에게 남기고 간 것이 많았다. 각자의 자리에서 굳게 살고 있는 ‘모든 바네사’를 영원히 잊지 못할 터였다.

한참 그것들을 바라보다가 침대에 몸을 눕혔다. 피곤이 쌓인 몸은 어렵지 않게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서로 다른 5개의 음률이 자장가처럼 울렸다.

그 소리를 벗 삼아 자신만의 연주를 이어나갔다. 사람들의 찢어지는 비명도, 왕녀를 부르짖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입가에 부드러운 웃음이 흘러나왔다.

바네사는 더 이상 악몽을 꾸지 않았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