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야는 밤이 되면 적막에 휩싸입니다.
어스름한 달빛, 이따금 들려오는 자장가 속에는 오래된 선조들의 전승이 남아 있는 법이죠.

잠에 들지 못한 아이가 칭얼대기라도 하면 황야의 웃어른들은 조곤조곤 전래동화를 들려주고는 했는데, 그걸 유난히 좋아하던 아이가 있었습니다. 매일같이 새로운 이야기가 있을까 기대하는 건 덤으로, 평소보다 밤이 긴 날에는 장래 훌륭한 이야기꾼이 될 거라는 꿈을 몰래 속닥거리기도 했을 정도였지요. 황야의 자원이 점차 고갈되어가고, 참변을 겪은 친우가 곁을 떠나고, 그런 위기 속에서 대족장의 자리에 오르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이 모든 일을 겪은 즈라한에게 남은 건 더 이상 이야기를 좋아하던 즈라한 아티르칸이 아닌, 대족장으로서의 사명감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을 지켜내고, 부족 연합을 수복하고. 많은 일들이 마무리 지어진 뒤에도 달라지는 건 없었죠. 오랜 시간 한 사람을 짓누르던 중압감은 본디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 있는 부류의 것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늘 그렇듯. 우리는 시간을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달이 차고 새벽이 지나면, 그 언젠가는 어린 시절에 두고 온 자기 자신과 다시금 마주할 수 있을까요? 계기는 의외로 멀지 않은 곳에서 찾게 될지도 모르지만, 결코 짧은 여정은 아닐 겁니다.

◆ CV.이민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