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가문의 가주들이 아직은 영주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던 시절 태어난 작은 소녀는, 필시 단명하리라는 의사의 확언을 듣게 됩니다.

후계자 수업은 꿈도 꿀 수 없었고, 하루 종일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병상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는 게 전부였지요. 나부끼는 바람과 드넓은 대해. 고요한 수면에 비치는 태양과 달, 은하수들까지. 로잔나가 꿈꾼 것들은 사르디나의 모든 것이었지만, 정작 두 손으로 잡아챌 수 있는 것은 방 한 칸이 고작이었습니다.

'나는 영원히 이렇게 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인가?'

그 의문 같은 단정에 제대로 된 물음표를 던져준 친구가 베로니카였지요. 생의 마지막 반항으로 나룻배에 올라탄 채, 무작정 넓은 바다를 떠돌며 방향도, 빛도, 인기척도 찾을 수 없었던 때... 그 순간 손을 내밀어 준 인어가 아니었다면, 로잔나는 지금 두 다리로 땅을 밟고 서 있지도 못했을 겁니다.

물론 모든 일이 마법처럼 해결되지는 않았습니다. 건강을 되찾았다 한들, 그전까지 가문의 흐름에서 비껴나갔던 소녀에게는 별다른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지요. 소녀는 목소리를 크게 내는 대신, 조용히, 아주 조용히 숨을 죽이고 힘을 길렀습니다. 메디치 가문 어딘가에 '늙지 않는 마녀'가 있다는 소문이 공공연히 돌 때쯤, 그리고 가문의 어른들이 소녀가 쌓아온 저력을 눈치채게 될 때쯤 모든 것이 시작되었지요. 메디치 가에 피바람이 불어오고, 스스로 가주의 자리에 앉은 자는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철혈의 가주가 공화국의 통령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까지, 그 길고 긴 시간 동안 로잔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역경을 거쳐왔습니다. 어떤 고난이 닥쳐와도 흔들리지 않고, 사르디나의 가장 무거운 닻으로서 중심을 지켰습니다. 비록 자신을 구해준 친우가 곁에 없을지라도, 그 영혼은 영원히 로잔나 안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고 믿으면서요.

◆ CV.김윤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