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에게 집이란 어떠한 위안도 위로도 제공하지 못하는 곳이었습니다. 내놓은 자식이래도 배는 곯지 말라고 내팽개치듯 보내졌던 곳이 바로 수행장이었죠. 떠밀리듯 시작한 길이었으나 생각만큼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이안은 늘 또래보다 총명한 아이였으니,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경쟁자라는 사실을 일찌감치 알았거든요. 하지만 어디 마음이 그리 쉽게 굳어지던가요? 모닥불에 구운 떡을 보고 눈이 돌아가는 아이들을 외면하고서 주린 배를 부여잡기가 쉬운 일이던가요. 아니나 다를까 금방 친해진 이들은 연무장의 흙바닥도 개의치 않고서 함께 뒹굴곤 했죠. 이안은 보통 그걸 보며 비웃는 쪽이었지만, 가끔은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손길에 딸려가 결국 콧잔등에 흙먼지를 묻혀오곤 했습니다.
충만한 나날이었죠. 성장이 가져다주는 충족감, 하나의 목표를 위한 긴 여정. 그 길에 함께 하는 친구들이 있었고 결과가 어떻든 이 신뢰는 영원할 거란 믿음이 생겨났거든요. 교류 행사 때마다 마주치는 악연을 어떻게 골려줄까 고민하는 것도 즐거웠고, 이따금 얼굴만 비추고 돌아가버리는 황족 친구에게 툭툭 말을 걸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었습니다. 그때는 왜 몰랐을까요? 이토록 자연스레 얻은 인연은 자연스레 희미해질 수도 있다는 걸요.
상황은 하루아침에 뒤바뀌고 말았습니다. 이안이 제 능력을 증명해 보인 순간, 다음 대 후계로 지목된 바로 그 순간에요. 급박한 발소리, 식은땀에 젖어 문을 두드리던 본가의 전령.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읊던 명령문을 들으면서는 헛웃음만 나왔죠. 달이 거하게 기울었던 오월의 밤, 영영 잊지 못할 그날부터 이안의 삶은 오롯이 자신의 것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가문을 다시 일으켜야 한다는 부담, 압박, 때로는 강요와 협박이 되기도 했었죠. 떨쳐내보려 용을 써 봐도 달에 한 번 돌아오는 월례 보고에는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왔습니다. 더 이상 수행은 즐겁지 않았고, 아무리 칭찬을 받아도 기쁘지 않았죠. 계승의 날 끝이 찾아올 거란 자기암시만이 유일한 버팀목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찾아온 계승의 날, 이안이 마주한 건 하나의 거대한 허무였습니다. 자신을 그토록 옭아매던 가문의 집착도, 다시 바라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란 열망도. 그 모든 걸 불살라버릴 만큼 커다랗고 텅 빈 허무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