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사람들에게 알드 룬의 입지를 물어보면 비아냥거리기 바빴을 겁니다. 코웃음을 치거나 고개를 젓는 건 예삿일이었겠지요. 왕족이 발 벗고 나서서 왕관까지 바친 나라를 어느 누가 좋게 평가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이런 정황을 확실히 읽어내기에는 타이밍이 영 좋지 못했죠. 그 무렵의 바네사는 아직 열 살도 되지 않았고, 고사리 손으로 삯바느질을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위치에서 태어나지도 않았으니 말입니다.
최초의 인식은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뒤였습니다. 갈루스의 이름 모를 왕족과의 약혼 이야기가 오가던 때였죠. 바네사는 그날따라 이유 모를 답답함을 느꼈고, 이동용 마차의 가리개를 처음으로 올려보았습니다. 그리고 날것의 시선과 마주치게 되었죠. 분노, 동경, 경멸, 선망, 혐오... 그 많은 감정들을 어떻게 단 한 마디로 일축할 수 있을까요? 바네사는 그 모든 시선에 함축된 의미를 하나하나 이름 붙일 만큼 영글지 못했지만, 이상하게도 어린아이들의 굶주린 눈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가 없었습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습니다. 한번 터진 둑은 메워질 일이 요원했죠. 바네사는 알기를 원했고, 곧 무지했던 과거를 뼈저리게 후회하게 됩니다. 출입 금지구역의 금서목록을 모조리 외우고, 폐간된 신문들을 닥치는 대로 수집했습니다. 예상외로 소질이 있던 잠행에도 금방 익숙해졌죠. 머리를 자른 것도 딱 이맘때였을 겁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죠. 길거리의 또래 소녀들에게 있어 머리칼이라곤 길러서 팔 수 있는 물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테니까요.
그리고 선택의 밤, 바네사는 끝끝내 자의로 알드 룬을 떠났습니다. 제국에 빼앗긴 수많은 권리를 되찾기 위해서, 왕실의 썩어내린 뿌리를 도려내기 위해서. 무엇보다 사랑하는 세상을 위해 그 세상을 등지기로 정했죠. 그리고 알게 된 겁니다. 개혁보다도 앞설, 머지않은 종말의 도래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