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르에서 사신수의 전승자가 갖는 위상은 특별합니다. 힘과 명예, 권력이나 세속과의 작별 같은 개념 밖에서도 말이죠. 절대적인 권능을 가진 천자와 그를 수호하는 네 신수. 이 신화 같은 이야기가 실재한다는 사실에 가슴 설레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저잣거리의 아이들은 서로가 어떤 전승자가 될지 점쳐보며 뛰어다니고, 시장에서는 어느 지역의 요괴를 누가 가장 먼저 토벌할지 내기판이 벌어지죠. 동경과 책임, 그 모두를 한 데 업은 자리가 곧 사신수의 전승자인 겁니다.
하지만 이안에게 있어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습니다. 그는 태어난 그 순간부터 쭉 '백호'로 자랐거든요. 하물며 자신의 이름조차 익숙지 않을 만큼이요. 세상의 불합리에 저항하는 용사들이 있지만, 반대로 점차 모든 것에 흥미를 잃어가는 사람도 있죠. 엄격한 수행과 훈련, 고역과 인내로 점철된 나날 속에서 이안은 어느덧 불만과 의문을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백호라는 자아를 받아들이고 그저 가문의 뜻대로 사는 것에 아무런 거부감을 느끼지 않게 되었죠. 이안은 흐르듯이 옅어지기를 택했고, 그렇게 일생을 보내게 될 줄로만 알았습니다. 다른 누군가가 내민 손을 잡기 전까지는요.
그 바람 같은 불길이 와닿았을 때, 혹은 이성과 투지로 끓어오르는 거울과 마주했을 때. 이안은 비로소 '다음'을 꿈꿔보게 된 겁니다. 처음 섞여들기로 한 세상은 따스하고 신비로웠죠. 매일 마시던 수정과의 맛조차 다르게 느낄 만큼 말입니다.
물론 그토록 오랜 세월이 한순간에 뒤집히진 않겠죠. 여전히 가문의 눈총은 따갑고 그간의 공백은 냉정합니다. 새로이 겪을 일들도, 새로 만나게 될 동료와 장소 또한 낯선 것투성이인데다, 하고픈 일이라는 건 막연하고 아득한 거리로만 느껴질 겁니다.
그래도 살아볼 수 있지 않을까요?
살아봐도 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