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류에게 삶이란 그리 어렵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모두에게 선망받는 위치에서 태어난 그는 손쉽게 세상을 주무를 수 있었고, 타고나길 유연한 성격과 이지도 주변의 움직임을 유도하기에 적절했죠. 황족이라는 신분, 차기 천자와의 동고동락, 주어진 지혜와 재능까지도 한 치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물론 그에만 만족하며 살 수 있었다면야,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난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겠지만요.
어떤 꼭짓점이 시작이었을까요? 하루가 멀다 하고 사라지는 사용인들을 보며 의아해하던 비류는 어느덧 변해버린 옛 친구의 거울상에서 어둑서니의 그림자를 보았습니다. 정처도 소리도 없는 비명이 너른 궁을 감싸고 있었고, 그 어둠을 벗어날 탈출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죠. 그러니 그 안에 웅크린 꽃망울에게는 딱 두 가지 선택지만이 남았던 셈입니다. 내면에서 자라나는 모순을 무시하고 지금껏 살아왔던 삶 그대로를 영위하는 것과, 모든 것을 불태울 겁화의 봉송자가 되는 것 말이에요. 물론 당신과 비류가 이렇게 마주하게 되었으니 그가 어느 쪽을 골랐을지는 자명하겠지요.
파란만장했죠. 일개 황족이 겪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할 일의 연속이 벌어졌습니다. 한때의 지기에게도 망설임 없이 살수를 보내는 천자를 피해 사흘 밤낮을 내달리는가 하면, 기어이 등선하기 직전의 반선에게 구명 받기도 하고, 그로부터 사사받아 최속으로 전승자 자리에 오르는 일까지 일어났으니까요. 비록 더는 그를 견제할 수 없어진 천자는 이를 악물었겠지만, 마찬가지로 비류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고요.
누군가는 황금의 궁을 등진 그에게 그래서 무엇이 남았느냐 묻겠지만, 비류는 코웃음을 치며 진정으로 등질 때를 기다리고 있다 답할 겁니다. 그의 발자국이 향하는 끝에 남는 게 매캐한 잿더미일까요, 혹은 끝끝내 피어난 백련일까요? 그가 추구하는 선도란 결국 어느 극에 달하게 될까요. 이 일대기를 함께 지켜본다면, 결코 지루하지는 않을 것이라 장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