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한 귀족의 삶은 어떤 형태일까요? 수많은 생을 한 가지 척도로 재단할 수야 없는 법이겠으나, 그들의 인생 역시 녹록지 않았을 테지요. 제약은 많고, 이득은 적고. 체면은 차리고 싶고, 배는 고프고. 또 구걸할 용기는 없거니와 자존심을 버리지도 못한 채 우매한 선택을 반복하지요. 언젠가는 돌아갈 수 있단 희망에 목매다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지는 이들은 별처럼 많습니다. 기회의 땅이자 비탄의 땅인 미르에서는 그리 드문 일도 아니었고요.
그러나 어려서부터 비정하기로는 남달랐던 이가 있습니다. 아이는 제 것이었던 부와 권력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날, 두 번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단 사실을 곧바로 깨달았죠. 이안은 남들보다 머리통 하나는 작던 나이에 열악하기로 유명한 토벌대에 자원했고,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은 덕에 금세 일취월장하게 됩니다. 부채를 잡기 위한 손은 검에 익숙해져갔고, 아름다운 발디딤으로 길러낸 균형감각은 어느 전장에서든 그를 살아남게 했죠. 최연소로 부대장 자리를 꿰찼을 때는 곧 차기 중앙군의 수장이 되리란 소문이 무성했습니다. 하지만 천자는 어째선지 그를 전승자 자리에만 올렸죠. 이로부터 수많은 풍문이 나돌았지만, 이안은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고 출정할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세 차례의 만남이 찾아왔죠. 고아한 황실의 핏줄, 멸시와 핍박에 지친 귀인족 동갑내기, 마지막으로 죽음의 위기에서 겨우 살아난 이국의 공주까지. 본인에게 넌지시 물어보면 부정하겠으나, 다른 셋은 입을 한데 모아 이야기할 겁니다. 이안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신을 도왔으며, 지금 세대의 분명한 주축이라는 사실을 말이에요.
경계심 많은 이 애늙은이. 여느 때의 동심부터 불타버린 범은 당신을 쉽게 믿진 않을 겁니다. 모든 걸 의심하되, 자리를 내어준 이에게 영원한 신의를 바치는 것만이 그가 세운 생존 전략일 테니까요. 하지만 비관할 필요도 없죠. 어쩌면 당신이야말로 그의 신뢰를 얻는 두 번째 사람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