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게 이는 높새바람. 선선한 여름밤의 빛무리. 아란이 기억하는 어릴 적의 유랑은 이처럼 좋은 기억뿐이었습니다. 물론 어째서 멈춰 서는 부락마다 눈총을 받는지, 말에게 먹이를 주고 안장을 손보는 동안에도 가급적 눈에 띄면 안 되는 건지 늘 궁금하긴 했죠. 하지만 타고나길 느긋하고 여유로운 성정 덕분에 그마저도 남들의 사소한 역정으로 치부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스승님과 함께 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견딜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세상사가 으레 그렇듯, 마음만으로 재난을 막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조짐은 있었습니다. 손가락질은 당해도 출입 자체가 금지된 적은 없던 장소들마저 하나 둘 가로막히기 시작했거든요. 천자의 승계가 완료되었다는 이야기를 어렴풋이 주워들었던 때. 그것이 기점이었고 숨을 옥죄는 손길은 거리를 좁혀왔죠. 사람들은 냉담했습니다. 전승자인 스승님의 존재 덕에 그나마 지켜지던 선마저 사라진 듯 굴었죠. 그러던 어느 날, 갈라진 둑이 기어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아란은 몰아치는 불길과 꺼져가는 비명 속에서 우주를 보았고, 강대한 신수의 이치보다도 이 경험이 뜻하는 스승님의 결심에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의식을 잃으면 그걸로 마지막이라는 예감이 들었죠. 아란은 버텼고, 가까스로 식어가는 스승님의 손을 붙잡았습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난 겁니다. 머리맡에 드리워진 손길, 비슷하지만 사뭇 다른 이의 기운 말이에요.
다시 일어선 아란은 유랑을 이어가기로 정했습니다. 전승자의 책임 따위가 가로막을 수 있는 건 없었죠. 고리타분한 의무에 매여 사는 것보다, 기로마다 새로운 여행을 결심하는 여행자로 사는 게 더 중요했거든요. 또, 이젠 여행할 수 없게 된 스승님에게 가져갈 이야기보따리도 넉넉히 채워야 하고요. 혹자는 어찌 그런 일을 겪고도 웃을 수 있느냐 반문하겠지만, 겪은 일이 아뜩한들 웃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이 귀인족 여행자의 호탕한 웃음은 오늘도 주변을 따뜻하게 비춰줄 겁니다. 언젠가 스승이, 그리고 친구가, 아란에게 가르쳐주었던 미소처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