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로 나아가는 것이 세상의 섭리라지만, 여기 그 흐름을 거스르려는 자가 있습니다. 브랜든 카스. 한때 성군이라 불리던 왕은 요정의 꼬임에 넘어가 백성을 모두 잃고 말았습니다. 흔들림도 잠시, 영혼들의 절규가 메아리치자 절망에 잠겨 있을 때가 아님을 알아차렸지요.

탁기를 삼킨 왕이 사라진 요정의 행방을 쫓아 세상을 떠돌자 곧 기이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를 마주한 이들이 하나둘 광증에 사로잡혔던 것이죠. 신자를 자처한 이들은 스스로를 제물로 바치고자 했습니다. 브랜든이 이를 외면하면, 그들은 기어이 육신을 내던져 영혼의 형태로라도 그를 따르고자 했죠.

죽음으로 구원을 행하는 교주에 대한 소문은 델포이아 어귀의 한 마을 보안관에게까지 전해졌습니다. 라르곤과의 만남은 브랜든 인생의 두 번째 분기점이었습니다. 라르곤은 정령의 힘으로 망령들을 잠재우려 했고, 브랜든은 백성들의 영혼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맞섰지요. 그리고 누구도 예상치 못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충돌하던 두 갈래 힘이 마치 처음부터 하나인 듯 뒤섞여버린 것입니다.

변덕스러워진 망령과 분노에 찬 정령은 더이상 싸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망령들은 라르곤을, 정령들은 브랜든을 따랐고 동행은 불가피한 일이 되었죠. 그리하여 두 사람은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고 흩어진 영혼을 하나씩 거두어들였습니다.

그러나 만들어진 신조차 2차 마도대전의 거센 물결을 거스를 순 없었습니다. 브랜든은 최전선에서 수많은 사람을 구했지만 그의 유일한 이해자만큼은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망령들과 정령들이 구슬피 우는 동안에도 그는 홀로 꿋꿋했습니다. 요정의 저주, 아니 기회가 남아있었으니까요.

왕국을 잃은 왕. 위신을 잃은 교주. 동료를 잃은 영웅. 상실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러도 브랜든은 굴하지 않습니다. 그도 언젠가는 신좌에서 내려와야 하겠지요. 하지만 아직은 견고하게 쌓아올린 믿음의 성채에 금이 갈 일은 없어 보입니다. 과거를 향해 걷는 자, 브랜든. 그는 진심으로 무엇도 끝나지 않았다고 믿고 있습니다.